오동나무 한그루에서 느닷없이 터지는 보랏빛 서러움이 줄줄이 오동 꽃이 되었다. 연한 꽃잎 위에 마음만 그려내는 오동나무 꽃. 달빛 그리운 날엔 오동 꽃도 흘러간다. 오동나무는 작년 가을에서부터 긴 여정의 겨울을 지나 늦봄에 불현듯 연한 보랏빛으로 꽃을 피운다.오동나무 꽃은 멀리 있으면 가깝게 오라고 가깝게 다가가면 조금만 더 가깝게 오라 한다. 자세히 보면 연보랏빛 꽃 바탕에 하얀 물감이 스며드는 것처럼 화가도 그려 낼 수 없는 ‘가까운 색의 조화’를 욕심 같아서는 자세하게 기억하고 싶지만 간신히 마음으로 훔쳐올 수밖에 없다.꽃받침
하얀 꽃 지고 나면 노란 꽃 핀다. 보리 꽃 피고 나면 뽀리뱅이 핀다. 며칠 전 산에 산벚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어느새 연한 산으로 변했다. 한 계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한다. 한창 피어있을 땐 언제 질 것인가 생각도 못 했다.그러나 한참 지나고 난 꽃이 지는 걸 안다. 이럴 때가 젊을 때다. 봄을 오십 번 넘게 경험한 이는 꽃이 한창 피었을 땐 저 꽃도 금방 지겠구나 하고 염려된다. 그것은 한참이나 더 피어있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그만큼 세월을 아끼고 싶은 뜻에서 그러는 모양이다. 이제 들판은 노란 물결이다. 뽀리뱅이 옆에 노란
생활은 삶의 의지가 있어야 하고 지식은 지혜가 있어야 빛이 난다. 생활에만 치우치면 삶이 딱해지고 지식만 치우치다 보면 머리에 과부하가 생긴다. 일상 속에 삶이 깊은 골짜기에서 내면화될 때 어느 날 그 기운이 융성해져 높은 산 위에서 들판과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봄꽃, 봄나물은 깊은 골짜기에서 삶에 대한 길을 물어왔다. 취나물은 뿌리가 그리 많지 않으나 그윽한 향이 있어서 생각을 맑게 한다. 족두리풀은 뿌리가 많아 생활은 복잡할지 모르나 그 뿌리에서 나는 향이 가슴까지 밀려와 삶을 뜨겁게 데운다. 둘 다 잎이 나는 시기는 같으나
마음에 햇살만 달면 그립게 다가선 제비꽃. 네가 평등한 자연이라면 나는 하루살이 생명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길에서 너는 여기 있고 우리는 저기에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지 말라. 이정표 없는 이 순간만큼 그저 강물 따라 낮은 데로 갈 뿐이다.요 며칠 사이 봄기운이 돋아나는 온화한 날씨 때문인지 산새 소리가 다양해졌다. 딱새는 싸리나무와 명감나무 사이로 ‘딱딱’하며 외로이 쪼아 대는 빨간 열매는 겨울이 남긴 풍경들이 남아 있는데 어느새 박새가 와서 숲 속의 정적을 명랑한 목소리로 깨우고 있다. 그동안 굴참나무의 마른 잎사귀들이 서걱서걱
무심히 달이 뜨고 산이 검게 되어도 나는 붉은 꽃이 되겠다. 사랑 때문에 잠들지 못해도 고요히 잠든 그리운 향기가 되겠다. 잠깐 지나간 철새가 나를 흔들어 놓아도 파란 하늘에 침묵의 붉은 명자꽃 옆에서 영원히 서 있겠다. 그 사람 아니면 못 살 것 같은 사랑의 열병을 알았던 그때에 열렬한 붉은 명자꽃 옆에서 한 참이나 피어있던 임의 눈물을 보았다. 촉촉한 봄비에 한꺼번에 사랑을 토해내도 사랑은 남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명자꽃 피고 져도 사랑하는 일이 많아진다.아침 일찍 새소리가 오묘해지면 파란 하늘가에 붉고 명랑스럽게 피
꽃샘추위에 꽃잎이 사그라질까. 삼월 눈이 오기 전에 봄비에 젖힌다. 하도 많이 젖어서 두 뺨에 하나의 눈물이 되었구나. 하나의 향기가 되기 위해 겨울밤에 얼마나 별 하나의 외로움을 견디어 냈을까.사는 것은 슬픔을 이겨내는 일이기에 봄물로 실컷 울어나 본다. 지금 봄비가 우람한 매화 꽃망울과 처연한 매화꽃에서 빗방울로 그리움을 달아 놓고 있다. 매화꽃 향기 이끌려 어느덧 매화나무 사이에서 와있는 시간이 무심한 세월에도 꽃잎에 새겨진 두 마음이 그때나 지금은 다를 바가 없다. 예로부터 매화는 창연한 고전미가 있고 더없이 고결하여 가장
산벚꽃이 필 즈음에 자운영 꽃도 피기 시작한다. 봄 들판은 토끼풀이 피고 자운영이 피어야 진짜 봄 들판답다. 봄의 새소리만큼 부드럽게 피는 자운영은 아무데서나 피지는 않는다. 봄이 오는 들판 한가운데에서 자운영꽃은 마음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들판으로 가는 길에서 피어있다.그 만큼 마음을 비우고 나지막하게 걷는 자에게 다가온다. 하염없이 산벚꽃 흩어지고 뻐꾸기 소리가 먼 산길을 헤치고 내려와 푸른 들판에 조용히 둥지를 튼다. 들판에 꽃들도 봄노래로 가득 차있다. 들판은 혼자 걸어도 둘이 손을 잡고 걸어도 아름답다. 아쉬운 것은 들판
바스락 숨소리 없이 피어 있는 구슬붕이는 한 발짝 움직여 놓고 다시 조용히 피어 있네. 내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 불혹이 얼마 안 남았는데 너무나 작고 귀여운 꽃들 속에서 가장 부드러움을 이제 알았네.봄은 오면 직접 노래를 하고 햇빛을 좋아하게 하며 연한 나뭇잎에서 눈에 띄지 못한다. 봄 산은 그냥 바라보고 있어도 즐겁다. 봄 산은 그냥 앉아있어도 귀가 즐겁다. 생동하는 대지로 하여금 모든 동식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한다. 여러모로 봄은 바쁘게 한다. 자손을 번창하기 위해 짝을 찾는 계절이기도 하다. 봄 산에 새들은 사랑하는 임을 찾기
이른 봄에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식물들이 있다. 풀꽃으로는 노루귀와 복수초다. 매화, 산수유, 목련꽃은 나뭇가지에서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봄을 환영하는 영춘화도 먼저 꽃을 피운다.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기 무섭게 꽃망울을 만든다.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들은 봄에 꽃을 피우기 위해 가을부터 준비한다. 추운 겨울에는 꽃망울은 아주 작게 움츠려 있다가 햇볕의 양이 많아지면 굵어지면서 활짝 터트린다. 나무는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탄수화물로 쓰고 남는 것은 저장한다.파란 잎에 엽록체는 뿌리에서 올라오는 물과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
마늘밭 매는 엄마 곁에서 한 줄로 살아온 엄마의 설움을 보았네. 겨우 겨울을 넘기고 이제 제법 파릇한 얼굴들이 엄마 집 곁에서 그 설움의 꽃을 피우네. 수선화야 서럽다 하지 말라.너보다 서러운 꽃잎 위에 서릿발 녹이는 눈물이 있어 햇살 가득한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고단한 삶의 여정 속에서도 새벽은 또 다른 기다림이 있다. 갓 돋아나오는 온유한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 아주 태곳적일지라도 오늘 내 앞에서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 같은 햇살이여.내 앞에 새싹을 보면서 진정한 자유를 본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연약함이 온 땅을 밀어낸다.
봄볕에 황홀하게 목욕하다 들킨 얼레지는 몸도 가슴도 없이 오직 얼굴 하나로만 하늘만 담는다. 낙엽 위에 봄비 오는 소리에 살며시 얼굴을 감춘다. 수줍은 듯 가냘픈 봄바람에도 흔들리다가 봄비 오는 날에 아무 말없이 눈물짓는다. 높은 산봉우리에서 얼레지꽃이 봄이 오는 산야를 가슴 벅차게 바라본다. 낮은 산에서는 연분홍 진달래꽃이 이 산 저 산 한 무더기로 피어서 화들짝 놀라게 한다.연분홍 물감을 온 산에 뿌려 놓아도 마음에서는 아직 여백이 있어 그리움으로 채운다. 높은 산꼭대기에는 깔끔하게 옷을 입고 봄 하늘을 닿을 듯 그립게 피어 있
우리의 봄. 우리의 물. 우리 집 마당. 우리 집 하늘. 우리 곁에 있는 풀꽃. 마음만 닿으면 동네방네 봄 내음이 한창 피고 만다.이제 멀지 않아 허리를 펴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난한 풀꽃들이 잠들지 않은 소쩍새에서 서럽게 피어나니 겨우내 고단한 마음 말끔히 잃고 가냘픈 뺨에 봄비 내리는 날 진달래도 보고 애기나리도 보자꾸나. 화사한 봄 햇살이 가득한 들녘에서 아직도 납작하게 들러누워 평등한 햇빛과 가장 깨끗한 낮달만 그리워하는 이름 없는 들꽃을 보자. 길 한가운데 잠들지 않은 가물가물한 생명을 쓰다듬는 초록별의 눈물을 보자. 죽어
부지런한 봄볕은 봄을 맞는 이들에게 더욱 부지런하게 한다. 평등한 봄바람은 작은 움직임까지 따듯한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오솔길에서 피어오는 아지랑이도 봄볕을 맞아 자유롭게 춤을 춘다. 새봄은 부지런한 이들만 가지질 수 있다. 새봄은 그냥 기다림만으로 오지 않는다. 봄에 대한 구체성을 갖고 있어야 내 안에서 진정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새봄과 연관성을 찾아본다.봄이 오면 무슨 꽃이 필까. 꽃이 한창 필 때 누가 그 옆에서 있었는지 하면서 읊조려 본다. 사람들과 관계에서 계절이 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돼
이름 없는 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름 없는 꽃들은 내 곁에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눈에 띄지 못해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다. 실제 꽃들은 자기 이름이 있다.그러나 이름을 달지 않는 데에는 소박한 삶이다. 누구의 돌봄도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단다. 화단에 꽃들과 비해 이름 없는 꽃들은 경제적 가치가 제로다. 때로는 농부들에게는 귀찮은 존재다. 그러나 풀 한포기 없는 세상은 상막하다. 부모, 주위의 사람들이 자연의 나이로 아니면 사고로 세상과 이별을 했다. 산다는 것은 하나 둘씩 없어짐을 경험한다.
쓴맛을 아는 사람만이 기쁨을 안다. 그 기쁨은 그리움을 낳는다. 눈 속에 파묻힌 쓴맛은 아직 심장 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지독한 쓴맛을 가지고 있기에 그 열렬한 가슴을 파묻고 있는가.아직도 입 안에서 쓴맛이 얼마나 있기에 말을 못할 정도인가. 흰 눈 위에 새파란 나뭇가지는 내 운명처럼 휘날린다. 관찰, 상상, 갈망, 의욕은 내 안에 운명처럼 서있는 고뇌다. 내 따뜻한 피가 심장부터 모세혈관까지 이르게 하는 것도 고뇌에 찬 쓴맛이 있기 때문이다. 쓴맛은 눈으로도 냄새로도 알 수 없다. 입맛으로 느껴봐야 한다. 어린 날에 쓴맛을 처음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흰 눈이 휘날리면 그 너머 어렴풋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꽃이 피면 옛사랑이 떠오른다.나무와 나무 사이에 열매가 맺으면 그리움이란 무게는 가지를 휘게 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유한한 공간이다.하지만 심연을 관통할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기도 하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세속적 욕망을 벗고 아름다운 향기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봄을 기다리게 하고 보고 싶은 사람을 더욱 보고 싶게 한다. 비가 오면 그냥 비를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나무 사이의 길을 걸으라 한다.
하늘과 바다가 있는 곳이면 송악이 있다. 태곳적부터 송악은 그런 운명인 줄 모른다.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운명 말이다. 우리는 고상한 미래를 꿈꾸면서 불안해한다.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에 대한 운명을 확신할 수 없다. 온전한 사랑을 나눌 시간적 한계가 공간적 한계도 가져온다. 몇 사람들만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운명에 처한다.사시사철 변함이 없는 사철나무도 계절에 따라 많이 바뀐다. 바람과 물 그리고 햇빛의 양에 따라 그 모습들이 다르다. 미미하게 스쳐지나가는 자연 속에서 사랑과 복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가야 당연한
뚝새풀은 남도에서는 독새기라고 한다. 인간적으로 몰인정 하는 사람에게 독새 같은 놈이라고 한다. 독새라는 말은 독사 또는 독수리의 방언도 있다. 이른 봄에 폭신폭신한 초록 들판이 되어 사료가 없던 시절 가축의 먹이로 이용했다. 그런데 왜 둑새기풀을 독한 놈으로 말해 왔을까? 아마 보리밭에 앉아 있는 어머니가 안타까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늘 종일 보리밭을 매도 둑새풀은 보리밭에 그대로 앉아 있다. 그만큼 둑새풀이 많았다는 뜻이다. 모내기 전 논에는 온통 둑새풀 천지였다. 연한 녹색의 이삭에 흰색, 갈색 꽃밥이 덮여 있다.뚝새풀은
처마 아래로 햇살이 깊어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시골집 장독이나 울타리 밑 작은 화단에는 주렁주렁 열린 꽈리가 붉게 익어간다. 서리가 와도 열매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있어 상하지 않는다. 꽈리는 가지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이다. 한 번 화단에 심어 놓으면 매년 봄마다 새로 싹이 돋아나서 어른 무릎 위까지 자란다. 유월 하순이나 칠월쯤에 희고 작은 꽃을 피운다. 작은 꽃이라 잎에 가려져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그러나 열매가 되면 흰 도화지에 주황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아름다운 색감으로 감돌게 한다. 열매를 싸고 있던 껍질이 불그
7월의 한밤중에 치자꽃 향기는 막혔던 가슴을 시원하게 뚫는다. 한번 스쳐가는 향기인데도 영원히 기억되는 꽃이 치자꽃이다. 꽃은 단잎으로 소소하게 피면서 그리 수다스럽지 않고 단아한 모습이다.집안 뜨락에 한 그루쯤 심어 습도가 많은 여름 날씨에 쾌청한 분위기를 만든다. 산속 깊은 산사를 찾으면 치자꽃 향기가 먼저 맞이한다. 옷깃만 스치는 사람 사이에서 치자꽃 향기는 잊을 수 없는 관계일 수 있다. 치자꽃 향기 옆에 그 사람이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기억된다. 아마 슬픈 일이면 세월이 흘러 넘실대는 강물이 되었을 것이다. 필 때와 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