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쑥개, 폐가가 된 옛 선주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쓰다 버린 가구들이 나뒹구는 빈집은 쓸쓸하다. ㄷ자 한옥은 선주 가족이 살던 본채였을 것이다. 북리 선주 집을 상징하는 2층 집은 문간채 옆에 서 있다. 2층 집 아래층과 옆 건물은 어구를 보관하는 창고다. 2층 선주 집은 덕적도 북리에만 있던 부의 상지이다. 지금도 몇몇 2층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좁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무너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 보지만 계단은 아직 성성하다. 2층은 전체가 하나의 넓은 방이다. 바닥은 널마루를
민박집을 나서자 다시 길이 시작된다. 그 여름날 해변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다. 오고 감이 늘 꿈만 같다. 바닷바람이 매섭다. 얼굴이 따가워 해변에 오래 서 있을 수가 없다.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바람은 간곳이 없다. 방풍림이 마을 사람들을 지켜준다. 저 숲의 나무들 덕에 사람들은 바닷가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섬이나 바람 거센 바닷가 마을에는 아직도 마을 숲에 대한 외경이 남아 있다.서포 1리 마을에서 고개를 하나 넘으니 서포 2리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너른 들판이 있다. 섬이지만 전형적
모든 섬은 산이다. 덕적도 도우 선착장에서 진리 고개를 넘다 말고 나그네는 산길로 접어든다. 사람들은 섬에 오면 대체로 해변으로 달려가지만 해변에서는 섬을 볼 수 없다. 산에 올라가야 비로소 섬의 전체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산으로 가면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흙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그네는 뭍에서 온 누구보다 먼저 섬의 속살에 안겨 볼 수 있다.흙과 나무와 바람의 향기, 숲에서 한번 걸러진 바다 내음도 한결 청량하다. 대체로 섬들의 산은 높지 않은 탓에 가볍게 오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며 푹신한 흙을
부둣가에서 만난 여자 아이 다예는 대남초등학교 풍도 분교 1학년이다. 학교에서는 두 분의 선생님이 세 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3,4학년 언니들은 다예의 좋은 친구들이다. 언니 둘은 2층에서 공부하고 아이는 1층에서 공부 한다. 마을의 여섯 살짜리 꼬마 현민이가 누나들 공부하는 교실에 놀러와 함께 공부하기도 한다. 다예는 언니, 동생들이랑 에버랜드 놀이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 시합도 하고, 갯벌에서 게도 잡고 물고기도 잡고, 조개껍질도 줍고 논다. 또 얼음땡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엄마놀이도 한다
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풍도로 건너왔다. 풍도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안산시지만 섬사람들은 오랜 세월 인천을 연고로 생활해 왔다. 자녀들도 대부분 인천에서 학교를 나와 인천에 정착해 산다. 작은 섬 풍도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풍도해전이 발발한 곳이다. 구한말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륙 침략의 첫 총성을 울린 곳이 바로 이곳 풍도 앞바다였다.1894년 7월, 이 바다에서 일본의 포격으로 청나라 함선들이 침몰했고 1100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수장 됐다. 청일 전쟁의 발화지 풍도. 전쟁에서 승리
대청도의 아침은 한가롭다. 바람은 잠잠하고 안개는 흔적 없다. 끊겼던 뱃길이 다시 열릴 것인가. 아침 8시20분, 백령도에서 나오는 배로 소청도에 건너갈 생각이었다. 부둣가 매표소에 들르니 1시까지 대기 상태다. 인천- 백령도 간 여객선 항로의 중간에 대, 소청도가 있다. 마침 소청도로 가는 행정선이 있어 얻어 탔다.소청도(면적 2.9㎢)는 느릿느릿 걸어서 돌아봐도 1시간이 안 걸릴 정도로 작다. 예동 마을, 대청면 소청도 출장소에 들른다. 의자는 다섯이나 되는데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들 출장을 나간 것일까. 주인 없는 사무실에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서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이 있었다. 기황후. 대몽 항쟁을 벌이던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뒤 공녀와 환관에 대한 징발이 시작됐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공녀 1000여명을 시작으로 100여년 남짓 동안 고려출신의 수많은 공녀와 환관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귀족의 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공녀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왕족이나 고관들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공녀로 끌려가는 여인들의 참혹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일제가 정신대란 이름으로 조선 처녀들을 납치해 간
몇 개의 고개를 넘었더니 온몸이 땀범벅이다. 하지만 더 이상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더위에 숙달이 된 것일까. 실상 더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 지독한 더위를 무릅쓰고 땀범벅이 되어 걷다보니 이제는 더위에도 아주 익숙해졌다. 사리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거북 겹 바위가 있다. 거북제를 지내던 신성한 바위다. 거북은 바다 쪽을 보고 있다. 신석(神石). 오랜 옛날 만삭의 바다거북이 표류중인 어부를 등에 업고 이 마을로 와서 목숨을 살렸다.거북은 세 마리의 새끼를 순산 했
홍도에서 흑산으로 건너 왔다. 섬은 여객선 터미널 입구부터 홍어, 전복를 비롯한 수산물 판매점과 횟집, 건어물 노점 등 관광 어촌의 면목이 여실하다. 저녁이 되자 뱃놀이를 떠났던 유람객들 서둘러 포구로 돌아온다. 비가 오시려는가. 빗방울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진다. 흑산항 밤거리를 걷는다.흑산에는 크고 작은 마을이 여럿이지만 상가와 여관 민박 등은 주로 예리마을에 몰려 있다. 해가 넘어가자 더위는 크게 한풀 꺾이고 바람이 서늘하다. 마을 노인들도 바닷가 평상에 나와 앉아 두런거린다. “외국인” 하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길 가던 마을
나그네는 옥녀봉에서 사량도 앞 바다를 본다. 생래적인 섬의 슬픔을 본다. 옛날 사량도에 옥녀라는 처녀가 아비와 둘이 살고 있었다. 어미는 옥녀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옥녀는 자라면서 점차 죽은 어미를 쏙 빼닮아 갔다. 어느 순간 옥녀에게서 여자를 느낀 아비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딸인 옥녀를 겁탈하려 들었다. 옥녀는 한사코 도망쳤지만 아비는 점점 더 무섭게 변해갔다.그러던 어느 날 밤 옥녀는 아비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하려는 행위는 차마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닙니다. 짐승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먼저 산에 올라가
법 벌이를 통해 이어지는 전통 여객선 2000 사량호는 아랫섬(하도)를 먼저 들른 뒤 웃섬(상도)의 금평항으로 입항한다. 사량도(蛇梁島)는 통영의 서쪽, 고성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사량도는 두개다. 나란한 두개의 섬을 사량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1.5km 거리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엄연히 다른 두 섬, 섬 사람들은 아랫섬, 웃섬으로 두 섬을 구분한다. 행정에서 부르는 이름 따위 소용없다. 세계에는 두 개의 섬밖에 없다는 듯이 그냥, 웃섬, 아랫섬이다. 이 얼마나 자존감 있는 이름인가. 모든 섬들은 다들 스스로가 세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 지금 연평도 주민들은 별로 큰 욕심이 없다. 폭격을 계기로 무슨 큰 지원 같은 거 바라지도 않는다. "큰 욕심 없어요. 옛날처럼 평화롭게 살수만 있게 해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주민들은 보복하자고 들어와 목청 높이는 사람들이 안 반갑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평화다. "여기가 없는 사람들 살기 좋아요. 자기만 노력하면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어요. 남북이 서로 대화도 많이 하고 포 떨어지기 전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하지만 여전히 평화는 안개 속이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작사판 연평도의 조기잡이는 임경업 장군과 인연이 깊다. 1634년 5월,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구출하기 위해 황해를 건너던 중 잠시 연평도에 정박한다. 간조 때 임 장군이 가시나무를 찍어 안목바다에 꽂게 하였는데 물이 빠지자 가시나무의 가시마다 수많은 조기가 걸렸다고 전한다. 이것을 계기로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그 후 임경업 장군은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바다의 어업의 신으로 등극했고 연평도에는 임경업 장군의 신당까지
눈물의 연평도 오늘 연평도 행 여객선은 두 개의 바다를 건넌다. 물의 바다와 안개의 바다. 물의 바다를 건너 왔으나 연평도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연평도의 사람도, 삶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폭격 이후 섬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왔지만 섬은 여전히 군사작전 지역처럼 긴장이 팽팽하다. 전쟁과 평화, 그 경계에서 연평도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연평도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게 흔들리며 부유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모순, 그것은 삶의 모순이고, 생애의 모순이고,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모순이다.2010년 11월 23일 오후,
할머니들이 점심상을 차리셨다. 생선부침, 돼지고기 볶음, 된장찌개, 김치와 젓갈, 고추 절임. 극구 사양해도 함께 점심을 먹자고 밥을 떠밀어 주신다. 통영에서 충무 김밥을 먹고 왔던지라 배가 부르지만 그래도 한 술 뜨자. 할머니들은 각자 밥그릇에 밥을 푸지 않고 큰 양푼 하나에 밥을 담아 놓고 함께 드신다. 같은 밥을 먹는 그야말로 식구다. 고추 장아찌가 새콤해서 자꾸만 손이 간다. 식초와 젓국을 넣고 담은 거라 감칠맛이 있다.“고추가 너무 맛있네요.”김영이 할머니가 바로 받아친다.“꼬추가 언제나 맛나고 개운커든.”옆의 할머니는 농
한국에는 4400여개의 섬이 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개, 나머지는 무인도. 한국은 섬나라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진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
노인과 이야기 나누는 사이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더 와서 수수 밭 일을 거든다. 너무 오래 일을 방해 한 것 같아 사진 한 장만 찍자고 하니 노인이 흔쾌히 허락 한다. 노인의 품이 멋있다. "젊어서는 한 가락 하셨겠어요."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뗀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제대로 한가락 하고 살긴 살았지." 노인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를 잇는다.노인도 어려서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다. "이십년을 예수 믿었는데. 왜 믿었냐 하면." 지금은 무인도가 된 저 건너 선갑도에 스님 한분이 암자를 짓고 살았었다. 노인은
옹진군 덕적면 문갑도, 노인은 말린 고추를 손질하고 있다. "어디 안 아픈 디 없지. 너무 나이도 많고. 그래서 아무 것도 못해요. 올해 여든넷이요. 그냥 방에서 밥이나 먹고 들어앉아 있지." 노인은 덕적도 도우 마을에서 문갑도로 시집 왔다. 열일곱에 낯선 섬으로 왔으니 문갑도에서만 67년을 살았다. "애기가 시집 왔으니께 맨 날 울었지요. 저 덕적 섬만 보고 맨날 운거에요. 가는 배나 있시야 가지. 우리 시아버지가 조그만 이런 배를 부려요. 돛단배. 시아버지가 날 덕적에 실어다 줬어요. 시아버지가 날 그렇게 이뻐 했어요. 조
수백억 혈세 낭비에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어 백령도에서 둘째 날, 오늘은 용기포구 민박집에 숙소를 잡고 사곶 해변을 지나 백령호와 간척지, 중화동 교회 전시관까지 걷는다. 후배는 발에 물집이 잡혔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따라 나선다. 사곶 해수욕장은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함께 세계에 단 두 곳 뿐인 천연 비행장으로 유명하다. 용기포에서 시작된 백사장은 10리길. 이곳의 모래밭은 미세한 규암 가루가 두껍게 쌓여 이루어진 해안이다. 물이 빠지면 콘크리트 바닥처럼 단단해서 한국전쟁 때는 유엔군이 천연 활주로로 활용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썰물
심청설화의 무대가 된 백령도 진촌리 북쪽 산 중턱에 심청각이 있다. 백령도는 황해도 해주와 함께 심청전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 두무진에서 15km 정도의 지점에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가 있다. 백령도 사람들이 인당수 혹은 임당수라 부르는 이곳은 옛날부터 백령도 어부들에게 물살이 세고 험한 곳으로 악명 높았다. 백령도와 대청도 사이에는 심청이가 연꽃을 타고 올라 왔다는 연봉 바위가 있다. 백령도에는 심청이 연꽃을 타고 떠내려 왔다는 연화리 마을도 있다. 설화가 현실의 무대를 빌어 생명을 얻은 것이다. 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