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당목항에서 생일도 서성항까지 뱃길로 30여분 걸린다. 배가 선착장에 닿을 무렵 커다란 생일케이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섬 주민들의 본성이 어질고 순해 갓 태어난 아기와 같다는 의미로 이 섬의 랜드 마크를 생일케이크로 정했다고 했다.섬 사람들 모두 바다라는 거대한 자연을 삶의 절대조건이자 기반으로 산다. 생일면 6개 마을도 다를바 없다. 그중 서성리 마을은 바다문화의 당제로 꽤 유명하다.매년 정월 초 마을 뒤 숲속에 있는 당집에서 당제를 지낸다. 이어 당굿과 마당밟기를 하며 풍어와 안전 그리고 마을의 화합과 마을 사람들
완도타워에 올라 내려다보면 완도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단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인다. 완도여객터미널 건너편의 공고지를 돌아 완도초등학교 건너편에 이르기까지 꽤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이 마을이 580세대 900여명 주민들의 터전인 항동리 마을이다. 기자가 좁은 골목길로 미로처럼 얽혀 있는 마을을 헤매지 않고 둘러 볼 수 있었던 것은 김광술 이장의 안내 덕분이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 올린 완도초등학교의 오래된 담벼락이다. 김 이장은 “곳곳에 금이 간 곳이 많아 안전사고가 우려된다. 600여 미
완도군청 뒤 남성리와 성내리 마을을 잇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완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뛰어 놀며 자란 재광 향우 김종성(42) 씨는 지난 설에 이곳을 찾아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살았던 동네가 이렇게 깔끄막이었다는 걸 25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다”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리어카 좀 밀어 줄래?”라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엿장수 아저씨가 마을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때면 재빨리 뛰어가 밀어주고 달콤한 엿 한 가락 얻어먹던 기억, 동내 친구들과 마을 꼭대기로 성뜰(
백운봉 아래 첫 마을인 용계리에 들어서면 큰 저수지가 보인다. 오염원이 없어 마을상수원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저수지의 물은 탐진강 물이 들어오면서부터 농업용수로만 사용하고 있다.물 맑고 땅 좋고 인심까지도 좋은 용계리에는 인물도 많다. 특히 후학양성과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박병두 선생과 얼마 전 고인이 된 김영순 화백이 이 마을 출신이다.마을회관 근처에 박 선생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공적비가 세워져있고, 군청을 비롯한 관공서 벽에는 김 화백의 작품들이 여럿 걸려있다.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용계리는 완도에서 기독교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된
58호 138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대구마을은 예전 ‘죽하리, 황금미라고도 했다. 1700년대에 ‘대구미(大口尾)’라고 불리웠으며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대구미(大口味)'라고 했다.옛 화흥포 항구가 있는 마을로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 왕래 길에 들러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뱃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완도의 상황봉 남쪽으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내려오다 멈춘 끝자락이 큰 거북의 형상과 같다해 대구미(大龜尾)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는데, 글자가 까다로와 대구미(大口咪)와 대구미(大仇咪)
동촌에서 가인재를 넘으면 동고마을이 나온다. 신지면의 맨 동쪽이라는 의미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한 고승이 동자와 함께 전국을 돌아 다니던 중 동고리 뒷산(배산)에 올라 앞바다를 보면서 “드디어 찾았구나,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다”라고 했다며 동쪽 끝에 동자가 살았던 곳이라 동고지라 했다고도 전한다.신지면 땅의 19%의 면적으로 월양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마을이며 본마을 너머로 명지포, 막동, 안골, 방죽포까지 포함된다.동고마을은 신지명사십리 해수욕장에 이어 신지의 제2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방풍과 방사림 역할을 하는 곰솔숲이
석장리 '멸치'하면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맛있고 품질 좋기로 유명하다. 멸치잡이 철에 갓 잡아 올린 멸치를 삶아 널어놓은 풍경은 마을 전체에 하얀 눈이라도 내린 듯하다. 햇볕에 반짝거리는 멸치는 마을전체를 온통 은빛 물결로 만든다. 석장리를 ‘은빛 마을’이라 부르는 이유다.석장리는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포구가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접전에 대비해 돌을 많이 모아두었다 해서 석장포라 불리다 지금의 석장리가 되었다는 마을 유래가 있다.또한, 임진왜란 이후 석장리 원장머리 부근까
노두리는 지금의 동백아파트 옆 골목길과 완도읍 파출소 앞의 노루목처럼 좁고 긴 길을 연결하면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설과 노루사냥 하던 시절에 노루가 가장 많이 잡히던 곳이어서 노두리라 부르게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동네를 걷다보면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로 바위들이 튀어나와 있다. 그 바위산을 따라 정상을 향해 눈을 돌리면 산 전체가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겨우 두 사람이 지나갈만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다.돈과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 이곳 땅값은 그 시절 서울 강남의 땅값보다도 비쌌다고 한다. 지금은
완도군의회부터 중학교 사이 동네를 윗마을이라는 뜻으로 우대미라 부른다. 예전 군내리 2구 당산리가 우대미에 속한다. 마을의 유래는 당산리 경로당 기념비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당산리에는 삼별초 난이 일어났을 당시 용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송징 장군의 위패를 봉안했던 와가(瓦家)당이 있었다. 당산리 이름도 송징 장군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백성들의 안녕과 마을에 재앙이 들지 않게 기원하던 와가당은 1972년 태풍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당집터와 장방형의 묘지 형태만 남아 있다.당산리 골목은 리어카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비좁게 길들이
군외면 불목마을은 마을위의 큰 바위 등 스님이 꿈꾸는 마을이라 해 불몽리(佛夢里)와 불목리(佛木里)로 불리다가 현재는 불목리라 불리고 있다. 숙종 때 김해 김씨가 정착을 시작해 형성된 마을이다.현재 불목마을은 김득호 이장을 비롯해 총136세대 241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주변을 이루는 농경지대와 함께 해안가 주위를 둘러싼 해안농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불목마을은 고려 현종 때부터 1855년(정종 6년)까지 군외면 관할구역이 삼분(三分강)돼 대창리, 영풍리, 사후도, 고마도, 토도와 함께 강진현에 속했었다. 이후 불목마을은 1
마을 위치가 북향으로 그늘진 곳에 파도소리만 들리는 착한 마을이라는 월부리는 1914년 월부리, 양지리, 가인리를 합해 행정구역으로 월양리로 통합됐다가 1935년 다시 환원, 분구됐다.1954년 귀양 온 심평복, 이현순의 은덕을 추모해 신호사를 짓고 매년 음역 3월 15일 42인의 제자 후손과 향교 유림 등이 제를 모시고 있다. 마을 남쪽 해안지대에 40여 가구가 사는 자연부락인 석화포 마을 안길을 경계로 위쪽은 양지리, 아래쪽은 월부리에 속한다.월부리의 예전 땅이름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농어바위라는 곳은 영신뫼 아래
청산도에서 가장 높은 매봉산이 품고 있는 상서마을은 동촌마을과 원동마을 사이에 자리한다.상서마을은 양지마을과 중흥마을과 같이 구들장논이 분포돼 있으며 청산도 입도지라고 알려진 ‘덜리’가 있다. 청산 입도할 때 청산팔경 중 응봉추월(매봉산 아래 물 좇고 산세 좋은 곳)을 찾아 한씨가 입도해 살았다는 설이 있으나 그 후손이 없고 고증할만한 자료는 없으며, ‘덜리’주변에 몇 기의 묘가 있어 그 묘가 한씨 조상의 묘라 전해오고 있다.정묘호란을 피하기 위해 이주해 온 밀양박씨, 언양김씨, 나주임씨가 정착해 마을을 형성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인마을은 노학봉에서 동쪽으로 내려 담재와 삼밭재산을 거쳐 산줄기는 월양리마을로 이어진다. 전주이씨 선산인 가을마을 뒷산 명산은 철새도래지다.동네서편은 신기천 하류로 과거 감조구간이었으나, 수문을 만들어 그 유입을 막아 간척지로 변했다. ‘모래등들’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바닷물이 들어오면 마을 앞 수문까지 숭어 등 바닷고기가 몰려든다.김해김씨가 지금의 가인리(갯)에, 초계최씨가 지금의 동촌(아랫가인)에 입주해 살게 됐으며 강원도에서 전주이씨가 이사와 웃 갯마을과 아랫 갯마을이 합해져 동네가 형성됐다고 전한다.특히 청산처럼 가인마을은
완도군에서 3번의 배를 갈아타야 닿을 수 있는 있는 금당도는 10개 마을에 1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동쪽으로는 부채 바위, 병풍바위, 스님바위, 상여바위, 소금강, 코끼리 바위, 거북바위가 해안을 따라 비경을 이루고 있으며 깨끗하고 고운 해변에서 즐기는 해수욕 또한 으뜸이다.천혜의 자연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갯벌 섬 마을 정보센터가 있는 가학리는 금당도에서 가장 처음 개척된 마을이라 하여 개기리(開基里), 학 모양으로 마을의 형태가 생겼고 그 학이 멍에를 넘었다 하여 ‘멍넘어’라고도 불리다 지금의 가학리가 되었다.가학리는 어
파도에 부대끼며 구르고 굴러 동그래진 갯돌이 등 맞대고 얼굴 맞대며 아홉 계단을 이루고 있는 정도리 구계등 해변에서 강판식(61)이장님과 만났다.강 이장은 태풍 볼라밴의 영향으로 구계등 갯돌이 많이 유실되긴 했지만 활모양의 해안선이 여전히 아름다운 해변으로 명승 제3호로 지정된 이유가 있다면서 마을 자랑을 먼저 했다.몇 년 전까지 정도리 어민들은 구계등 갯돌 위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멸치 삶아 말리는 일도 했지만 지금은 공원 관리 차원에서 화흥포 마을 선창으로 옮겨 이 일들을 한단다. 이 때문에 어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의 불편이 크고
본지에서는 지역 최일선에서 마을을 위해 발로뛰는 이장들의 노고를 알리고 그 마을의 속사정을 들어보고자 12개 읍면 이장들을 만나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실제 마을 주민들의 복지 체감도는 '이장이 하는 만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이장 역할의 중요도는 높다. 두번째 마을은 군외면 영흥마을이다. “젊은시절 바다에 의지하며 낙지, 바지락, 석화 채취로 자식들을 교육 시켰던 내 삶의 터, 하지만 지금은 연세 높으신 분들만 남아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고 살고 있다. 고령의 주민들만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소득원도
본지에서는 지역 최일선에서 마을을 위해 발로 뛰는 이장들의 노고를 알리고 그 마을의 속사정을 들어보고자 12개 읍면 이장들을 만나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실제 마을 주민들의 복지 체감도는 ‘이장이 하는 만큼’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이장 역할의 중요도는 높다. 첫 마을은 신지면 임촌마을이다. 신지면 임촌마을 조종민(68) 이장조종민 이장과 약속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필자가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좀 기다리면 오시겠지라는 마음으로 들어선 임촌마을 경로복지센터에는 20여 명의 마을 주민들과 조 이장이 나를 반긴다.조 이
바람 거세고 파도 높은 바다. 고기잡이가 쉽지 않았다. 배가 많지 않았다. 가파른 산 아래 자리한 마을. 땅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밭뙈기에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고구마가 식량이었다. ‘쌀 서 말 먹고 시집가기 어렵다’는 말이 예사였다.어선 몇 척은 도미 삼치 장어 우럭을 잡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돈으로 바꿀 수 없었다. 육지는 멀었다. 마을에 조기잡이를 하는 어부가 하나 있었다. 몇몇 주민은 조기를 사 굴비로 만들었다. 경남 삼천포, 마산까지 가서 팔았다. 마을 공동작업으로 김 명포 진포 미역 앵초 은행초 천초
“우리 마을은 모두가 부지런 혀. 태풍이 불거나 바다조건이 안 좋으면 타 부락 사람들은 일찍 끝내고 가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우리 부락 사람밖에 없어.”지난 28일 마을회관에는 주민 30여명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마을 회의가 열렸다. 주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기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마을 유래 남선마을은 조선 효종 때에 마을을 형성해 속명으로 꿀포리라 하였고, 석포라고 부르다 1855년 완도 내면에 황진리로 통합, 편입 되었다.해방이후 1946년 황진리에서 분리 되면서 "남방게"라고 부르던 이름을 따 남선
▲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곳 70여명이 살고 있는 흑일도 마을 완도군 군외면 당인리에 속하는 섬 흑일도는 해남 땅 끝에서 약 2㎞가량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에 백일도와 동화도가 있고, 바로 마주 보이는 섬이 흑일도다. 섬의 모양은 동서로 길며 남서쪽 일부 해안에 만입이 있을 뿐 해안선이 매우 단조롭다. 북쪽 해안에는 약간의 모래사장이 발달되어 있으며, 해송과 후박나무가 자생하고 난대림 숲이 우거져 있다. 해지는 섬이란 뜻으로 흑일(검은나라)이라 칭하였다고 전하며, 해안의 모래가 검은색을 띤다고 하여 흑일도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