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자연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뀐다. 계절마다 큰 변화와 하루아침의 작은 변화를 보면서 위대한 교과서라는 말이 세월이 흘러서야 알게 되니 아쉬움이 남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그 자연 속에서 인간을 볼 수 있다고. 남쪽에선 치자나무, 사철나무, 먼나무, 호랑나무가시 등이 있는데 이들도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봄에 새순을 돋아나기 위해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버터 낸다. 나무는 잎사귀를 떨쳐 에너지를 아끼고 뿌리에 집중한다. 풀은 최대한 엎드려 차가운 바람을 피하고 땅의 온기를 받는다.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는 벌써
흙담에 안팎에서 호박꽃 부드럽게 핀다. 어린 호박잎은 아주 연한 작은 호박을 감싼다. 호박꽃 냄새는 그냥 스쳐가도 길게 남는다. 무덤덤하게 피어 그리 관심 있는 모양은 아니다. 호박꽃은 두터운 사랑을 감싸고 있다. 불현 듯 마주쳐도 꽃 안에 암술이 보일 때도 있다. 허름한 토담에서 그리 예쁠 것도 없이 핀다. 그래서 아름답다. 외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정이 간다. 아주 간단한 디자인도 아니다. 아주 복잡한 액세서리도 없다. 일상의 평온한 가운데 네가 있어 행복하다. 주고받는 데에 물질만은 아니다.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닌 데에도 정이
계절은 고향이다. 고향이란 공감각적 시상을 떠오르게 한다. 만추라는 계절은 비어있는 공간이 아름답다. 마른 잎이 간신히 달고 가는 나뭇가지에 작은 새가 깃털을 세운다. 가을을 그렇게 보내기 싫은 모양이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복잡해졌다. 수많은 메세지가 오고 가는 공간에 딱 하나만 보인다. 만추의 풍경이다. 형형색색 만추의 계절 속에 내가 보인다. 비로소 공간이 툭 터진다. 생각하는 것들이 더욱 깊어진다. 단풍잎이 마른 잎으로 변해간다. 길가에 꽃들도 씨와 간신히 피어있는 꽃들에게 아름다운 경계를 본다. 하루를, 순간순간을 아껴두고
가을의 빨간 열매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백당나무, 찔레나무, 호랑나무가시, 피라칸사스, 홍시 등이 가을의 등불을 켜고 있다. 산에는 옻나무들이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나무도 피가 흐르고 있다. 붉지는 않지만 투명한 물과 흰 물이 흐른다. 그게 가을이 되면 노랗고 붉게 한다. 삶을 사랑하고 아끼면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자식을 낳아야 한다. 생명의 연장선상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한 나무에서 무한한 생명탄생에 축제를 여는 듯이 환희에 차 있다. 하나하나 열매들이
늦가을은 내가 살아온 날보다 길다. 어느새 감잎 떨어져 서리가 내리듯 나이 육십이 되었는데도 늦가을은 내가 살아온 기억보다 길다. 초등학교 첫봄소풍을 기다리는 밤은 설레는 봄길이었다. 그 봄 길은 산으로 산으로 이어졌고 꿈길 같은 아름다운 봄 산이었다. 수많은 봄여름이 지나갔고 육십의 늦가을 산에 이르렀다. 잎이 다 떨어진 산감이 유심히 빛난 늦가을은 내가 살아온 삶보다 깊다. 나이 육십에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다만 늦가을에 대해 깊고 완연한 품에서 만족할 뿐이다. 쪼그리고 앉아 들꽃을 보는데 어서 서둘러 가자
오래된 집도 아끼면 빛난다. 밤이 오면 불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대신 샛별이 지키고 있었다. 빨간 사루비아 꽃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바라보고 있다. 아직도 마당에 사루비아 꽃씨가 떨어져 해마다 핀다. 어머니가 좋아한 꽈리가 토방에 걸려있다. 세월에 변색이 되었더라도 어머니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딸들의 눈 건강을 챙기기 결명자도 마당에 심었는데 이젠 스스로 씨가 떨어져 열매를 맺는다. 얼마나 애정이 많았으면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자랄까. 어린 날에 아버지가 손수 사랑채를 지었다. 여기서 딸들이 생활해왔단다. 노란 결명
지난봄 산에서 꾸임없이 나를 표현했다. 그 꽃길을 걸으면서 모든 생물의 움직임을 보았다. 가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고 느끼는 것이다. 가을은 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다. 낙엽 지는 소리도 없이 듣는 것이다. 지나온 봄 산에서 꿈꿔왔던 모든 것들을 낙엽 위에 내려놓는 것이다. 옷깃을 여미고 느린 강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다. 낙엽이 한 잎 한 잎 쌓이면서 내 마음의 추억도 그렇게 쌓이고 있겠지. 가을은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한 눈으로 보는 데 있다. 그렇기 위해서 눈을 감고 상상으로
산등성이 넘어 마른 풀덤불 속에 피는 꽃. 관심이 없어서 부르는 풀도 많지만 많이 안다고 해도 모르는 풀들이 많다. 세상은 이리저리 엉켜서 일어나는 일도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연결되어서 좋은 현상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연결고리를 좀이라도 알기 위함은 지식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먹고 입는 것에 치중하지 하는 것보다 가르치는 일에 많은 열의를 발휘한다. 경험해서 아는 것은 시간의 한계가 있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다양한 지식을 습득한다. 미리 알고 경험하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 그러나 여러 단계를 걸쳐서 간접적으로
외딴집 외로이 늙어가고 있다. 창호지는 누렇게 변했고 찢어진 창살 사이로 집 안이 보인다. 그 길었던 세월은 간데없고 마당에 잡초만 무성하다. 이제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군불을 지피며 마음의 온도를 올릴 때다. 얼굴에 빨갛게 비쳐온 그 사람은 이맘때이면 다시 찾아온다. 외딴집 혼자 세월을 보내는 것도 살아있기 때문에 그 쓸쓸함이 보인다. 가을의 무게는 가을볕의 충만함이다. 따가운 햇살이 오히려 마음을 살찌우기 위함이다. 가을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계절은 마음의 보약이다. 좀 더 가깝게 온 가을을 눈으로 만질 수 있어
사랑의 계절을 가지 않아도 된다. 이제 추억의 길이 되었으니 지나버린 것에 대하여 아련한 기억으로 가자. 코스모스 길 따라가던 가을바람과 은물결도 있다. 가까이 가야 보이는 쑥부쟁이 들꽃도 보랏빛 얼굴이 너무도 아름답다. 비와 바람이 와서 눈물이 되어주었던 게 지금은 고실고실한 들길이 되었다. 계절이 낳아 기르고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저만치 가을 길로 가고 있네. 화려했던 꽃보다 고운 말씨가 좋다. 이리저리 뛰어놀던 강아지보다 가만히 앉아 있는 들꽃이 좋다. 가을바람이 흔드는 곳에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가을을 뜨겁게 맞이하리. 남도의 황토 땅에서 그 열정을 지상으로 나오라. 절규를 넘어서 낯선 얼굴이 된 사람아 서역으로 떠나리. 그곳은 우리의 이정표가 있다. 저녁 하늘은 기다리지 않아도 또 이정표 뒤로 떠나리. 바람 한 점에도 흔들리는 꽃잎들은 노래의 음이 되고 마침표 없이 가을 길을 걸어가리.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너의 얼굴 순간 눈길 한 번 준 데에서 긴 세월이 필요했으리라. 생의 법칙은 수많은 세월이 연결되어 여기까지 왔겠지만 그래도 정이라는 마음들이 연결되어 가을 하늘 끝에서 열렸다. 눈이 부시게 붉은 꽃. 아직 심장이 여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온 것들이 나를 멈추게 한다. 가을 스산한 바람이 그렇다. 나날이 변해가는 풍경도 이때만큼은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게 한다.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변해만 간다. 멈춰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가을 풍경만은 그대로 변한 것 없이 흘러만 가는 듯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봄이 가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왔다. 실상 보이는 것들은 얼마나 변하겠느냐 쉽지만 가을이란 붉은 색에서 한참 동안 머무른다. 살아온 만큼 붉은색이 더욱 진해졌을까. 가지가 휘어져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진한 눈물을 나 혼자만이 훔쳐볼 수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남는 것들을 위해선 계절은 섬세하게 부서진다. 한낮에 선명한 것들이 내 안에 무수히 들어와 앉는다. 일상의 공감한 영역을 매일 반복하면서 무엇인가 의미하고 싶어진다. 평온한 들판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예감하면서 한순간에선 그저 바라볼 뿐이다. 삶의 의지란 게 변화를 원하면서 제 자리를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수만 그루 꽃나무들이 초록 들판으로 터진 길 위에서 선명한 그리움을 들춰내고 있다. 조용한 강가에서 피리 떼들이 펄떡이며 온갖 선율이 맑은 하늘로 펼쳐진다. 인생이란 멀리 있는 이정표를 향해서
하늘이 높게 열리면 꽃의 자리가 더욱 커진다. 긴 모가지를 흔들며 가을을 노래한다. 비옥한 경작의 꽃이 아니라 꽃이 자랄 수 없는 땅에서 꽃이 된다. 그 많던 개울물도 하나도 남김없이 내보내야만 꽃이 된다. 가을의 꽃들은 어설프게 붙어있는 살들을 빼내야 꽃이 된다. 그 넓은 들판에선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다. 그것을 경계하는 선상이 가을의 꽃이다. 운명 위에 운명의 꽃들이 춤을 춘다. 살아온 만큼만 나의 운명을 사랑하노라. 영원한 생명이 나를 춤추게 할 순 없다. 오늘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만이 나의 기쁨이다. 촘촘하게 엮어진 소리
산에서 피는 꽃들은 듬성등성 핀다. 좀 쓸쓸하게 피어있는 것 같지만 조용히 들려다 보면 무엇인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글을 남긴 선인들은 산과 강을 빼놓지 않는다. 산과 물은 가장 깨끗한 몸과 마음이다. 아침나절이면 안개빛에 얼굴을 씻고 한낮에는 녹음에 마음을 씻는다. 저녁이 가까우면 노을빛은 내 운명을 노래한다. 산 속에서 가만히 들려다 본다. 그 작은 섬세함은 마음의 끝을 세워야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엉켜진 끈들이 이어져 큰 산을 이룬다. 붓 가는 대로 쓰면 된다. 붓끝은 가장 부드럽다. 그러나 산이 그려지고 나무가
인생은 예행연습이 없다. 똑같은 연극의 스토리도 그날의 마음이 상태에 따라 느끼는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꽃밭에 물을 주고 꽃을 유심히 바라보면 나날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습관처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깨울칠 때가 많다. 계절을 쉼 없이 바뀌고 이 계절에 무슨 꽃이 피었을까. 꽃들이 불현듯이 다가오면 그 느낌도 새롭다. 오늘 내 육신은 물질대사가 왕성하게 흐르고 있다. 지난 과거는 죽은 육신이다. 마음과 생각도 마찬가지다. 이른 봄에 심어놓았던 애기부채꽃이 지금 내 신체의 일부가 된다. 꽃과 내가
바람은 길이 없다. 오늘 아무 목적 없이 길을 떠난 사람들과 함께 가는 바람은 나의 친구다. 매일 길을 떠난 사람들과 정직한 자연은 질서 속에 자유로움으로 오늘 새로운 옷을 입게 한다. 날카로운 가시나무도 8월에 언덕에선 아주 부드러운 풀잎이다. 바람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초록의 눈망울이 일렁인다. 여름에 꽃들은 강인하다. 그래서 빗물에 흠뻑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매일 길을 떠나 것도 또 다른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다. 지성과 이성은 늘 한계에 부딪친다. 부딪쳐 깨어지고 다시 자연의 한 장 위에 글을 쓴다. 덧칠한 무수한
꽃집에서 채송화 몇 그루 사 왔다. 가까운 시선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압도적인 풍경이 감동을 주지만 대문 옆에 채송화 몇 나무만 있으면 된다. 꽃밭을 화려하게 만들면 시선이 집중이 안 된다. 지날 때마다 슬쩍 보고 지나가도 여운이 남는다. 꽃나무가 크면 꽃을 볼 것인가 잎을 볼 것인가 구별이 안 간다. 채송화는 지난 세월에서 많이 보아 온 꽃이 특히 장독대 옆에서 본 기억이 난다. 산에 들에 야생화같이 생명력은 없다. 그러나 집 화단에 듬성듬성 심어 놓으면 자연스레 공간이 나온다. 잎을 따다가 물 빠짐이 좋은 곳에 꽂아 놓으면 된다
빈집에서도 저녁때가 되면 붉은 하늘이 내려온다. 낮 동안 아무리 햇빛이 채워진다 해도 쓸쓸하기만 하다. 지나간 자리에 초롱초롱한 풀꽃들이 빛을 내고 있다. 아침이면 이슬이 불을 밝힌다. 붉게 달구었던 양철지붕은 소낙비 같은 열정이 있었으리. 지붕은 한참 퇴색되어 가고 먼 산을 바라보는 마을도 고요하기만 하다. 서까래에 대못은 지나온 세월이 있었는지 잘 뽑히지도 않는다. 지난날에 보리밥 바구니가 걸려있었을 것이고 보리밥 쉰내가 나도 당장 먹을 것이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을 다독이었다. 텃밭에 쑥갓 냄새와 하얀 쌀밥을 상상만으로도 지난
숲에서 나를 찾기에는 시간이 나를 버리고 간 곳이다. 또 다른 시간이 내 앞에 앉아 꽃으로 피었다. 대지를 뚫고 바람이 부는 곳으로 꽃향기는 흐르고 흰 구름으로 다시 꽃이 되었다. 숲에서도 규범이 있고 규칙이 보인다. 그래서 작은 꽃들이 살아남는다. 사람들이 먼 기억으로 사라지는 날에 숲에서는 다정한 이름이 있다. 가난한 농부가 이름을 불러주었기에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농부들이 가장 선한 언어를 사용해 지은 이름들이라 이웃집 아줌마의 이름 같다. 숲속에서 모든 언어들을 함축하고 있다. 닭의난초, 며느리밥풀, 사위질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