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무리 지면 달무리 지면 이튿날 아침에 비 온다더니 그 말이 맞아서 비가 왔네. 눈 오는 꿈을 꾸면 이듬해 봄에는 오신다더니 그 말은 안 맞고 꽃이 피네
1760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 와 초계최씨(草溪崔氏)가 처음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웃마을이라고 하여 상리(上里)가 되었다. 1914년 신기(새터몰)와 합하여 신상리가 되었다. 1947년 신기가 분구되고, 1983년 세포리가 분구했다.1933년 211번지에 신지공립초등학교 월양분교장으로 설립인가 되었으며, 1996년 동초등학교로 개명되었다. 1985년 범죄없는 마을로 지정 수상 받아 그 기념사업으로 마을회관을 설축했다.면내에서 유일하게 해안에 접하지 않는 마을로 농사를 주업으로 해변산중 마을이다. 동부마을을 관장하는 면수가 있
완도해양경찰서는 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8.15km 맨몸바다수영 대형 태극기 펼치는 행사를 지난 11일 신지 명사십리해수욕장에서 개최했다.(사진 제공=완도해경)
15세기 마을의 서쪽 끝에 마도진(馬島鎭)이 설치되었는데 이곳으로 배들이 오가는 것이 불편하여 얼마 안 있어 강진현 마량(馬良, 馬頭)으로 이전하였다. 일설에 마도진이 마량으로 옮겨가자 옛날(古) 마도진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섬이름을 ‘고마도’라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도 전하는데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대사가 군마를 길렀다 하여 ‘고마도’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17세기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조씨(趙氏)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었으며, 법정동으로 군외면(郡外面) 불목리(佛目里)에 속하지만, 행정동으로는
보길 선창마을의 낙조(落照)옛날 영암지역의 한 부자가 선친의 묫자리를 잡기 위해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불렀는데 이 지관이 '십용십일구 보길(十用十一口 甫吉, 섬 내에 명당자리가 11군데가 있는데 10군데는 이미 사용되었고 나머지 1군데도 이미 쓸 사람이 정해졌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이 길하고 길한 섬 보길도에서도 일출은 동쪽 예송마을, 일몰은 서쪽 선창마을가 알아준다.사진은 선창마을의 낙조(落照, 저녁에 지는 햇빛) 모습.
400여 년전 선조대 때 나주 나씨, 하동정씨가 처음 이주하여왔고, 그후 무안박씨, 수성최씨 등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1855년까지 해남현 은손면에 소속되어 정돌리라 하였으며 또는 정돌리라고도 표기하였다. 1914년 중분리 지역의 1부를 통합하여 군내면으로 편입되었다.중도리 해안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며 명승 제3호 구계등이 있다. 삼별초난 때 송대 장군이 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감시하였다는 송대목이 있다. 그때 송장군이 주민에게 휼민한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을 설당하여 음력 정월2일 제향하고 있다.
광복 이후 농촌에서 효자 노릇을 했던 발동기는 모터가 없던 과거, 발동기를 이용해 곡식을 탈곡하거나 방앗간에서 떡을 찧었다.「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속에 들어가 발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대 내 안의 발동기가 되어 나를 살게하고/ 발동기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발동기 전문
522년(중종17) 군내리에 가리포진이 설진된 후 속칭 옹개에 원(院)을 세웠던 곳이다. 원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원동(院洞)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옹개 원터라고 하는 지명이 전해오고 있다.1917년 신정리에서 이전되어 온 군외면사무소의 소재지가 되면서 마을이 급속도로 발전했다.완도군의 관문이며 제1차로 가설된 철교는 6·25 한국전쟁 때 파괴된 한강철교의 잔해를 보수하여 만든 핀트러스형으로 1968년 12월 31일 완공해 1969년 1월 개통했다. 그러나 교통량 증가로 1985년 11월 23일 새로 대교를 가설해 이용하였으나 국도
황근(黃槿)은 아욱과 낙엽성 떨기나무로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식물이다. 우리나라 무궁화 속 식물 중에 유일하게 자생하는 식물로, 6월에서 8월에 옅은 황색의 꽃이 피어 노랑무궁화라 불리운다.척박한 바닷가 암석 틈이나 모래땅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우리나라 자생식물로 전국에서 제주도와 소안도 월향리가 자생지이다. 내염성이 강하고 파도를 통해 종자를 퍼트리는 특성 때문에 주로 해안가에 피어 방조림용으로 적합하다.항일의 섬 소안에는 지금 노란무궁화가 한창이다.
지울 수 없는 사랑의 火印 가슴에 찍혀 오늘도 달아오른 붉은 석류꽃. 초록의 잎새마다 불을 붙이며 꽃으로 타고있네 (이해인 詩 전문) 길고 단단한 껍질이 툭하고 터지며 다홍색의 여린 꽃잎이 피어났다. 암술이 많아 다산의 상징으로도 여겨지는 석류꽃의 꽃말은 ‘원숙한 아름다움’이지만 석류 열매에서 석류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석류 알갱이들의 모습이 조금 모자란 듯이 보이는 사람이 이를 훤히 드러내놓고 히죽거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리숙함, 바보’라는 꽃말도 함께 가지고 있다. 사랑에 빠져본 이는 알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히죽
1944년 매립해 육지가 된 고금 척찬리. 현종대(1660년대초) 남평 성씨, 남평 방씨가 이주해 와 마을 남쪽에서 거주하였으며 수산업을 하다가 육지로 나갔으며 그 후 제 성씨들이 이주해 와 마을을 형성했다. 형성 당시 자역도라 하였다가 그 후 자찬도라 칭하게 됐다. 한일합병 후 조선총독부에서 갱치도 사업 추진 당시(1910∼1918년) 중앙에서 내려온 측량기사 이씨가 자찬도의 지명은 좋지 않으니 척찬이 좋겠다고 자기 임의로 측량도면에 척찬도라 표기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본도와 떨어진 섬이었으나 1944년 이기동 씨 주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