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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섬-2부 옛 고향 모습을 간직한 띠섬 “대모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07.06.10 15:34
  • 수정 2015.11.0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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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동리와 모서리 마을주민 287명이 살고 있는 대모도 섬마을  

청산면에 속한 섬으로 소모도보다 커서 “대모도”라 하고 주변에 소모도, 청산도, 여서도가 있다. 완도항에서 남쪽으로 13km 거리에 위치한다.  띠가 많다하여 띠섬(茅島)으로 불린다.  마을의 돌담이나 형형색색의 양철지붕은 청산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향토색 짙은 옛 고향의 느낌을 주는 섬이다.

 

대모도는 1981년 다도해해상 국립공원으로 편입되었다. 한해 7,000여명이 이 섬을 다녀가지만 대부분 관광보다 낚시가 주 목적이다. 주민이 거주하는 마을은 2곳으로 동편마을을 ‘모동리’서편 마을을 ‘모서리’라고 한다.

 

면적이 5.83㎢(약 1.749.000평)로 아담하고 작다. 110 가구 인구 287명이 거주하고 있다. 생업형태는 대부분 반농반어로 농산물은 고구마, 감자,·쌀 등이 주로 생산된다. 사방이 청정해역인 이곳은 전복 등 해산물이 많이 나며, 사면이 바다로 형성되어 낚시터로도 유명하다.여느 시골이나 섬처럼 이곳 역시도 노령층이 주류를 이룬다

 

대모도의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1600년경 마씨, 진씨 등이 처음 들어왔으며, 그 후 추씨, 김씨, 서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일부 모도에 사는 추씨가 완도 사정리 마을로 들어와 살았다. 추씨의 본가는 모도인 셈이다

외진 낙도인 탓에 독특한 풍습도 남아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는 산신제를 지내는데, 제주는 1개월 전부터 외도를 금하고 정성을 드려 만수무강과 소원성취를 빈다. 또 마을에서 흉한 일이 발생하면 제주가 산신제를 잘못 모셨기 때문이라고 탓하고 산신제를 다시 지낼 정도로 믿음이 강하다.

 


         ▲ 대부분 60대 이상의 고령의 노인들만 김 미역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다

          ▲ 대모도에는 젊은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고령의 노인들만이 이섬을 지킨다

노인들만 사는 낙도 섬

 

낙도는 50대 이상의 노인들만 사는 곳으로 인식돼 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애 우는 소리가 그친 지 오래고, 초등학교는 분교로 격하됐다가 폐교가 되는 곳이 늘고 있다. 대모도 역시 1명의 선생님과 1명의 학생만이 모도분교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초가집이 간간이 보였지만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사람이 떠난 집은 대부분 담장만 남아 있다. 초가지붕 이을 사람도 없으니 노인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슬레이트를 얹었다. 그래서 대모도에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상투 귀틀집' 같은 정겨운 초가지붕이 없다.

 


                사방이 바다와 섬으로 둘러 쌓인 아름다운 대모도 해안마을 모습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의 섬

 

과거 대모도에는 일본의 침략강탈에 저항하는 ‘모도청년회’가 조직되었었다. 마을의 개량서당 지원과 항일투쟁이 목적이었다. 1920년 초 천병섭, 장석칠, 정두실, 최찬규, 서재만등이 마을청년 14명과 함께 조직되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각 마을을 다니면서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일본은 망하고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옵니다.”“ 2천만 민족을 위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하합시다.”하며 주민들에게 항일무력시위를 권유했다. 그리고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박열, 정남국 등에게도 긴밀히 연락을 하여 급진적인 애국운동가 와도 뜻을 같이했다.

 

특히, 이들은 1925년 1월 월례회의에서는 일본인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4월 회의에서는 일본인들을 응징하고 경찰서 등 관공서를 파괴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뒤 청년회의 비밀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회원들과 함께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천홍태 애국지사는 1926년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1927년 6월 18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단1명의 교사와 학생이 유일한 청산초등학교 모도분교

 

순수함이 느껴지는 고향 같은 섬

 

대모도는 꾸밈이나 과장이란 수식어가 통하지 않는 청정바다의 깨끗함과 기암절경, 그림 같은 수목들이 많이 자생한다.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낚시꾼들이 대부분 이곳을 찾지만 개발이 더딘 탓에 아직도 70년대 시골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감어린 마을풍경, 돌담, 소로 밭갈이 하는 대모도 농부들을 간간히 만나볼 수 있다.

 

도둑, 거지, 대문이 없는 관계로 제주도의 풍습인 정낭이나 정주목과 비슷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대모도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기도 하다. 이곳은 면출장소(061)550-5613, 5133를 비롯하여 모도분교(061)552-8106 경찰지소, 우체국 분국, 보건진료소, 통신공사 분국 등이 각 1개소가 있다.

 

교통편

 

▶모도는 완도의 다른 낙도에 비해 교통편은 좋은 편이며, 섬사랑호, 신해호가 모도를 경유한다.

완도항(061) 554 - 4207, 553 - 0840, 553 - 0841에서 오전~06:30,10:30,오후16:30 있으며,

대모도에서 완도행 시간은 오전~09:00,오후13:00,18:00이다.

숙식할 곳은 모동리에 민박집이 다소 있으며, 모동리 이장 이영모(011-632-8144)씨에게 문의해도 된다.

 

객원기자 배정준

 


       ▲위로부터 모도의 전통가옥 외부 침입자를 막기 위한 제주도의 정낭과 비슷한 문 70년대 벙커로 이용되던

          광망대 그리고   완도와 모도 청산도를 오가는 섬사랑호

 



                                                   ▲포구가 인상적인 대모도 선착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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