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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선원들이 조업 중 가장 그리워한 것은 "김치와 여자"

강제윤 시인 - 신안 재원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1.10.06 10:29
  • 수정 2015.11.1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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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나 민어 등 회유성 물고기들의 이동을 따라 섬이나 포구에 임시로 형성되는 시장이 파시(波市)다.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 색주가 등이 들어서서 선원과 선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여름 해수욕장의 한철 장사와 비슷하다.

재원도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 법성포 파시 등과 함께 서남해의 대표적인 파시였으며 가장 최근까지도 남아 있던 파시이기도 하다. 재원도에 파시가 형성된 것은 일제 때부터 민어 파시로 유명했던 임자도 타리 파시가 사라지면서 부터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타리파시의 맥이 근처의 재원도로 옮겨온 것이다. 그 무렵에는 재원도 또한 민어파시로 성황을 이루었다, 인천, 충무, 부산, 흑산도, 조도, 군산, 영광 등 전국 각지의 어선 600~700여척이 재원도 앞바다로 몰려들었다.

"배들이 강에 한나 빡빡 차버렸어. 배만 밟고 임자까지 건너간다 그랬어."
바다에는 일본 무역선도 떴다. 흑산도나 목포 사람들이 들어와서 술장사를 많이 했다. 한창때는 술집만 30여 집이 넘었고 작부들이 200여명이나 됐다. 파시가 서면 재원도 바닷가 모래사장 부근에는 가건물이 세워지고 아리랑 주점, 진주관, 법성관, 화신관 여로집, 영란주점, 대도상회, 목포상회, 조도상회, 목포여인숙, 친절상회, 은하다방 등 술집과 상회, 다방, 이발소, 옷 가게 등이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모래사장에 돌을 쌓아 물양장을 만들고 그 위에 판자로 가건물을 지어서 외지 상인들에게 세를 받고 임대해 주었다. 가게들은 길을 따라 마주보고 들어섰다. 후일에는 시멘트 블럭으로 건물을 지어 임대했다. 한 철에 20~ 40만원의 세를 받았다.

함근산(76세) 이장님은 재원도 사람으로는 드물게 파시에서 장사를 했었다. 1980년대 재원도 바다에서는 민어와 병어, 부서, 꽃게가 많이 났다. 80년대 중반 이장님이 주점 조합장을 역임할 때 "주점이 19개, 다방이 6개였고 아가씨들은 모두 126명이었다." 선원 중에는 아가씨 빚을 갚아주고 고향 데려가 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선상 생활에서 뱃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김치와 여자".

재원도에 입항하면 선원들은 진탕 마시고 놀았다. 4월에 시작된 재원도 파시는 6~7월이 전성기였고 9월초가 되면 끝났다. 해변은 다시 조용해 졌다. 한 여름의 신기루 같은 것이 파시였다. 파시 때는 각 지방 선원들끼리 패를 지어 패싸움도 많이 했다. 술에 취한 선원을 제지 하는 과정에서 재원도 청년들과 선원 간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러 선원과 동네 처녀가 눈이 맞아 결혼하고 재원도에 눌러앉아 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원들은 선주로부터 선용(선불금)을 받아 기분 내며 술 마시고 노는데 돈을 다 탕진했다. 그렇게 돈을 모으지 못하고 해마다 선원생활을 하며 늙어갔다. 지금도 많은 선원들이 비슷한 처지다.  

 파시는 외지 배와 상인들의 무대였다. 재원도 주민들은 관객에 불과 했다. 배 지을 자본이 없어서 어장을 할 수 없었고 상인들에게 가건물을 빌려줄 생각만 했지 자신들이 직접 장사를 할 생각은 못했었다. 물론 주민 중에도 몇 사람이 술집이나 담배 가게를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어장을 하는 집도 몇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물이나 김치를 담아서 파는 것이 전부였다.

동네 처녀나 아이들도 물지게를 져다 팔았다. 본래부터 재원도에 어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 때 재원도 사람들도 범선 안강망 배를 했었다. 진성인(66세) 전 이장님의 아버지도 안강망 배를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배를 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재원도에서 어로가 다시 시작 된 것은 파시가 한창인 1977년 무렵이었다. 진성인, 강대율, 함택산 세 사람이 낭장망으로 어장을 시작했다. 재원도 파시는 89년 무렵에 막을 내렸다.

요즈음 재원도에 외지 배는 없다. 재원도 배들은 주로 봄에는 병어와 서대 여름철은 민어를 잡는다. 재원도를 비롯한 임자도 근해는 민어의 고장으로 유명하지만 요즘 재원도 배들은 민어보다는 서대잡이를 더 선호한다. 주로 여름철 보양식으로 가격의 등락이 심한 민어보다는 연중 안정적인 서대가 더 큰 소득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김장용 추젓 새우를 잡고 겨울이면 동백하를 잡는다. 여름에도 새우잡이를 하지만 올해는 해파리가 기승을 부려 오젓, 육젓은 거의 잡지 못했다.

재원도 마을의 북쪽 해안으로 가는 길, 밭에서 할머니 한분이 풀을 매고 있다. 밭 전체가 향나무 분재로 가득하다. 삽목을 해서 키운 분재다. 한참 분재 값이 좋을 때 심었다. "옛날에는 엄청 비쌌어요. 한그루에 20만원씩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값이 너무 떨어지고 마땅한 임자도 나타나지 않아 팔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나무를 처 주고 만들어야 작품이 돼요. 나무 치기가 힘들어요. 다 칠라면 한 달도 더 걸려요. 그냥 놔두면 베러 부니까. 풀도 매줘야 하고. 지심도, 지심도 엄청 징하요. 징해." 처음에는 1500주를 심었는데 중간에 조금 팔고 죽어버리기도 해서 지금은 1000주 남짓 남았다. "심은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23년이요." 23년이라니, 한철 밭의 풀을 매기도 얼마나 징그러운가. 그런데 할머니는 같은 나무 밭의 풀을 23년 동안이나 매면서 정성껏 키워온 것이다.

재원도의 저녁, 정박한 어선들마다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선실 식당은 저녁 짓는 손길로 분주할 것이다. 파출소 초소 곁을 지나는데 젊은 선원 한사람이 초소장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애인이 업소에서 일하는데 손님에게 맞아서 턱이 깨졌다. 선원은 울산에서 술집에 나가는 5살 연상의 여자와 동거 중에 배를 타러왔다. 애인이 맞은 것도 억울한데 때린 사람이 치료비를 안 물어주는 것에 더 속이 상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돼서 상담을 하러 온 것이다. 대체 세상 끝에 와서도 삶의 문제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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