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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연평 바다에 돈 실러 가세!

강제윤 시인 - 연평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2.09 08:57
  • 수정 2015.11.1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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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연평도
오늘 연평도 행 여객선은 두 개의 바다를 건넌다. 물의 바다와 안개의 바다. 물의 바다를 건너 왔으나 연평도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연평도의 사람도, 삶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폭격 이후 섬을 떠났던 주민들이 돌아왔지만 섬은 여전히 군사작전 지역처럼 긴장이 팽팽하다. 전쟁과 평화, 그 경계에서 연평도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연평도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게 흔들리며 부유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는 모순, 그것은 삶의 모순이고, 생애의 모순이고, 감히 형용할 수 없는 모순이다.

2010년 11월 23일 오후, 북한의 폭격으로 무고한 생명이 살상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그날 이후 연평도 주민들은 한동안 피란민이 되어 떠돌아야 했다. 주민들 중에는 한국 전쟁 때 연평도로 피란 와서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살아생전 다시 피란민이 될 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평화롭던 시절 나그네는 몇 번인가 연평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섬을 걸어서 일주하기도 했었다.

또 연평도 조기 파시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한동안 연평도에 머물기도 했었다. 낯선 나그네에게 술과 밥을 내주시던 주민들을 기억한다. 그때 연평도는 더할 데 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섬이었다. 그 따뜻한 환대와 평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때의 기억이 꿈처럼 아득하다.

나그네가 처음 연평도란 이름을 들은 것은 '눈물의 연평도'란 노래를 통해서 였다. '눈물의 연평도'를 만든 것은 1959년의 태풍 ‘사라’였다. 그때 연평도 어장으로 조기잡이를 갔던 많은 어부들은 끝내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은 퇴락했지만 연평도는 역사의 한 시절을 풍미했던 섬이다.

오랜 세월 연평도는 조기의 섬이었다. 영광의 칠산 바다와 함께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 어장이었다. 해마다 5월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수백억 조기 군단이 몰려오면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일 정도로 황금어장이었다. 조기 철이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파시 때 연평도에는 수천 척의 어선과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한 배를 타면 천배를 건너다녔다." 연평도는 주민과 선원, 상인들 수만명이 북적거리는 하나의 해상 도시였다. 

남북으로 갈린 연평도
오랜 세월 동안 연평도는 해주 문화권이었다. 연평도에서 해주는 30km 거리에 불과하다.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해주가 북한 땅이 되면서 연평도는 인천 문화권으로 편입됐다. 그때 연평도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등은 이제 북한의 영토다. 연평도에서 1.6km 거리에 북방한계선(NLL)이 지난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인해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깝던 이웃 섬마을이 갈 수 없는 먼 나라가 돼버렸다.

연평도는 옛날부터 군사적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왜구와 해적들을 감시했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인천에서 뱃길 122km의 먼 거리지만 연평도는 이제 생활권도 행정구역도 인천이다.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개의 유인도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크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연평면의 본섬인 대연평도 또한 가로 3.7km, 세로 2.7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섬은 동북쪽의 낭까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세 개의 뿌리를 축으로 삼각형 모양의 해안선을 이룬다.

연평바다에 돈 실러 가세
조기의 섬, 연평도의 조기잡이가 역사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의 세종실록 지리지다.

“토산(土産)은 조기[石首魚]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난다.”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해마다 봄이면 연평도는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1960년대 후반까지 연평 바다는 수천 척의 배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어선들이 몰려오면 연평도에는 파시가 섰다. 조기떼의 이동을 따라 임시로 형성되는 바다의 시장이 파시(波市)다. 파시 때면 선구와 생필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서고 어선을 쫓아온 ‘물새떼’가 어부들을 유혹했다.

한창 때는 색주가만 100여 곳이 생겼고 ‘물새’라 부르는 작부들이 500명도 넘었다. 파시동안 작은 섬 연평도는 수 만 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10톤 남짓 되는 중선(안강망 어선) 한 척이 한 번 조업에 참조기를 100동(10만 마리)씩 잡는 것도 예사였다.

1800년대 중반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조기잡이 선단이 연평도로 몰려든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연평도 조기파시의 역사는 조선시대에 이미 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1910년에는 황해, 경기, 평안도 등지에서 300여척 이상의 중선 배들이 몰렸다. 1934년에는 어선이 600~1000여척, 1936년에는 조기 안강망 어선 1000척과 운반선 300척, 봉선 700척 등 2000여척의 선박이 몰려들었다. <매일신보>는 파시가 절정에 달한 1943년 4월 말, 연평도에 무려 5000여척의 배들이 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4년에도 연평도의 조기 어획량은 97억 마리였다. 1947년 파시 때 연평도 어장에 동원된 어부들은 연인원 9만 명에 달했다.

당시 연평도에서는 파시보다 작사(作詐)란 말을 주로 썼다. 연평파시가 아니라 연평작사(作詐)라 했다. 지금도 연평도 노인들은 “작사 때...”로 칭한다. 작사(作詐)란 ‘거짓을 만든다’는 뜻이다. 없던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가 쓰였을 것이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 이전투구, 연평 작사에서는 물건을 거래하며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이었느니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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