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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인생의 압축판 같은 섬, 흑산

강제윤 시인 - 신안 흑산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3.22 09:05
  • 수정 2015.11.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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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고개를 넘었더니 온몸이 땀범벅이다. 하지만 더 이상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더위에 숙달이 된 것일까. 실상 더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더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 지독한 더위를 무릅쓰고 땀범벅이 되어 걷다보니 이제는 더위에도 아주 익숙해졌다. 사리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거북 겹 바위가 있다. 거북제를 지내던 신성한 바위다. 거북은 바다 쪽을 보고 있다. 신석(神石). 오랜 옛날 만삭의 바다거북이 표류중인 어부를 등에 업고 이 마을로 와서 목숨을 살렸다.

거북은 세 마리의 새끼를 순산 했으나 산후통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주민들은 거북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거북제를 지냈다. 거북은 마을의 안녕과 길흉화복을 관장하며 사람들과 함께 살아 왔다. 이돌 거북은 대주가다. 막걸리를 6말 5되 5홉을 마셔야 취기를 느끼며 가볍게 움직인다. 그때부터 영험을 나타낸다고 주민들은 믿어왔다.

고갯마루에서 모래미 마을(사리)로 넘어가는 길가는 상록 활엽수인 잣밤나무 군락이 잘 보존 됐다. 다도해의 섬들에서 이제는 상록 활엽수림을 보기가 쉽지 않다. 저 상록수 군락만으로도 섬은 소중한 자산을 가진 것이다. 사리 마을은 자산 정약전이 유배 생활을 하며 자산 어보를 저술했던 마을이다. 1801년(순조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면서 자산은 그의 아우 다산 정약용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다산은 강진으로 가고 자산은 우이도를 거처 흑산도까지 왔다. 1816년 자산은 흑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16년 형극의 세월 동안 자산은 흑산도와 흑산진의 위수지역인 우이도만을 오갔을 뿐 끝내 뭍을 밟아보지 못했다.

그 세월 자산은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고, 흑산 바다의 어류연구에 매진해 자산어보를 남겼다. 자산이 서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 복성재다. 새로 복원된 복성재 마루에 앉으니 사리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당시에도 이 섬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에게 흑산도는 태어나 태를 묻고 평생을 살아가야할 세계의 전부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어떤 이에게는 감옥이기도 하다. 유형이 아니었더라면 존재하는지 조차도 몰랐을 세계에서 자산은 살다 갔다. 그가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자산은 새로운 학문 세계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은 결코 자산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그가 몸을 의탁했던 흑산 섬 사람들 과 함께 이룬 업적이다.

사리마을 입구에는 “손암 정약전 선생께서 통한의 세월을 꿈으로 승화시켰던 마을”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읽힌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보다 뭍에서 온 유배객만을 추앙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손암 또한 자산 어보에서 마을의 ‘창대’라는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저술이 불가능 햇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자산 어보는 손암 개인의 연구가 아니라 창대와 손암의 공동 연구 성과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마을은 또한 손암의 유배지로만 기억 될 것이 아니라 창대의 마을로도 기억 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심리 마을 당산 나무 아래 동네 노인들이 두러 앉아 술을 자신다. 마을은 언덕에 있고 당산 나무는 주민들의 쉼터다. 사랑하는 후배 이 주빈의 고향마을이라 더욱 정겹다. 그도 어릴 적 저 당산 나무 그늘에서 많이 놀았을 것이다.

“여가 무지 시원한 곳인데, 웬만하면 바람이 있는데 오늘은 바람이 없네.”
노인은 나그네를 불러 소주 한잔을 권한다. 갈증이 심해 술보다는 마실 물이 급하지만 물은 없다. 종이컵 가득 따라 주는 소주를 마시니 술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인들은 평상에 둘러 앉아 찐 생선을 먹는다. 상어와 우럭, 삼치 등의 물고기와 떡과 술. 잔치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느 집에 제사가 있으면 당산 나무 아래로 음식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과 나눈다. 할머니 한 분이 상어 고기 한 토막을 건네주신다.

“상여 괴기도 있고 제사를 크게 지냈구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제사 음식 안묵는다믄서.”
“영감 들은 고리만 주는구만 간데 토막을 줘야지.”

마을 앞바다에서는 휴가차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배를 몰며 그물을 끌고 있다. 횟감이라도 잡을 요량이지만 고기가 잘 잡히지 않는 모양이다. 노인들은 뭍에 앉아서도 바닷 속 사정이 훤하다.

“옛날에는 요 앞 바다에서도 조기 멸치, 갈치도 많이 낚으고 그랬제. 요새는 없어요. 서대, 장대나 멫 마리 걸리면 다행이제. 미역 양식 한다고 바다 길을 막아 놓으니까 괴기가 못 들어 와요. 그라제, 사람이나 괴기나 길을 막으면 못 다니제.”

마을은 고기잡이보다는 해조류 양식에 기대고 산지 오래다
하루를 꼬박 걸어서 흑산 섬을 일주했다. 오르막과 내리막 길을 수십 번은 족히 오르락 내리락 했다. 단 기간에 이토록 많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험해 보기는 처음이다. 이 섬은 마치 생의 압축판 같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걸은 끝에 결국 도착한 곳은 처음 그 자리, 예리 마을이다. 그 자리는 또한 섬에서 가장 낮은 자리다. 사람이 높은 곳에 있다가 아무리 깊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해도 처음 그곳이 아닌가. 사람은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흑산, 참으로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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