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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원나라 황제의 유배지 대청도

강제윤 시인 - 인천 대청도, 소청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3.29 08:47
  • 수정 2015.11.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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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서 황후가 된 고려 여인이 있었다. 기황후. 대몽 항쟁을 벌이던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한 뒤 공녀와 환관에 대한 징발이 시작됐다. 고려 고종 18년(1231년) 공녀 1000여명을 시작으로 100여년 남짓 동안 고려출신의 수많은 공녀와 환관들이 원나라로 끌려갔다. 귀족의 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공녀들은 출신 성분에 따라 왕족이나 고관들의 처첩이 되기도 하고 유곽에서 몸을 파는 창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공녀로 끌려가는 여인들의 참혹상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일제가 정신대란 이름으로 조선 처녀들을 납치해 간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침략전쟁의 가장 큰 희생양은 늘 여자들이었다.

고려 때 사람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녀 또한 그렇게 공녀로 징발돼 갔다. 공녀인 기씨녀가 원나라 황후가 된 데는 고려출신 환관 고용보의 조력이 컸다. 고용보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기씨녀를 황제의 다과를 시중드는 궁녀로 만들었다. 고용보와 또 다른 고려출신 환관 박불화 등의 협력으로 기씨녀는 왕실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순제의 제 2 황후가 됐고 나중에는 제 1 황후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는 1353년, 자신의 아들 아유시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 왕실의 재정과,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원나라 멸망 때까지 30여 년간 권력을 누렸다. 기황후는 고려에서 징발하는 공녀제도를 폐지시켰다. 원나라가 주원장에게 함락 되면서 몽골 고원으로 쫓겨 간 이후 기황후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아유시다라는 몽골 내륙에 세워진 북원의 초대 황제 소종이 됐다.

대청도라는 한적한 섬마을에 와서 갑자기 기황후 이야기를 떠올린 것은 기황후와 대청도의 인연 때문이다. 기황후가 대청도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순제는 대청도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원 나라 문종(文宗)이 순제(順帝)를 대청도로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 부처 하나를 봉안하고 매일 해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 하였는데, 얼마 후 돌아가서 등극하였다.”( 이중환 ‘택리지’ 팔도 총론)

1330년 원나라의 권신 엔터무르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순제의 아버지 명종을 암살했다. 그때 명종의 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대청도로 유배 보내졌다. 1년 5개월 간 대청도에서 유배살이를 한 토곤 테무르는 원으로 돌아가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로 등극했다.
택리지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전설이 대청도에도 전해진다. 대청도의 전설은 태자가 계모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것으로 변용되었다. 전설은 지금의 대청 초등학교 자리가 순제가 살던 집 터였고 대청도의 주산인 삼각산도 순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궁궐터였다는 곳에서는 기왓장도 발굴되었다.

 

 

원나라 침략기의 제주도처럼 대청도나 백령도 또한 원 지배계급의 유배지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다. 하지만 교려말 조선 초 왜구들 등쌀에 대청도를 비롯한 많은 섬들은 오랜 세월 무인도가 되어야 했다. 그 사이 섬의 역사와 사람살이의 내력은 끊겨버렸다. 서사가 사라진 섬. 저 섬들의 깊은 밭고랑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파묻혀 있는 것일까.

대청도는 면적 12.63㎢, 해안선 24.7㎞.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의 먼 거리에 있지만 북의 황해도 장산곶과는 19㎞에 불과하다. 백령도, 연평도 등과 함께 군사분계선 상에 위치해 분단을 몸으로 안고 살아왔다. 대청면 소재지가 있는 선진포구에서 동내동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포구에도 몇 군데 민박집이 있지만 오늘은 배낭을 풀지 않고 걷기로 했다. 숙소를 정하고 걷는 길은 짐이 없어서 가벼운 반면 길을 걷다 마음 가는 곳에 머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세상 일이 어디 늘 만족스럽기만 하겠는가. 삶이 그렇듯이 여행 또한 과정이다. 여행은 곧 길이다.

목적지에 이르는 것보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야말로 여행의 진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여행의 과정을 삶의 과정을 생략해 버리는가? 서둘러 목적지에 가기 위해 과속의 페달을 밟아 대기만 하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을. 여행길에는 서둘지 말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천천히 걷기보다 더 훌륭한 여행의 기술은 없다. 천천히 걸으면서 나그네는 스스로와 대면하고 세계와 내밀하게 소통한다. 일상적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사유의 폭을 무한대로 확장 시킨다.

인적 없는 길을 세 시간 동안 걸으니 사탄동 해변이다. 마을의 민박집에서 하룻밤 유숙 할 생각이었지만 여름철에만 민박을 한다니 별 수 없이 다시 면 소재지까지 나가야 한다. 날은 이미 저물기 시작했다. “할머니 선착장까지는 얼마나 가야 하나요.” “멀어, 이 밤중에 거기를 어찌 갈려고.” 할머니는 나그네의 소매를 붙드신다. “빵이나 하나 먹고 가.” 할머니는 구멍가게 주인이다. “돈 안 받을 테니까. 먹고 가. 거기까지 갈려면 배고파서 안 돼.” 할머니는 걸망을 맨 나그네가 안쓰러워 보이셨나 보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저는 부둣가에 가서 밥 먹으면 되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빵, 많이 있는데, 하나만 먹고 가지 그래.”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할머니.”

할머니는 밤길 떠나는 길손이 내내 걱정이시다. 길에서 만나는 어머니들은 세상 모든 자식의 어머니다. 어둠 속에서 산길을 넘는다. 해안에는 안개 자욱하고, 파도는 도로까지 넘실거린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대청도의 밤길. 옛적 등짐 진 나그네들도 막막한 이 밤길을 넘어 다녔을 것이다. 네 시간 만에 다시 제자리, 섬 일주도로를 따라 면 소재지 선진포구로 돌아 왔다. 어느새 밤은 깊을 대로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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