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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청일전쟁의 발화지 풍도

강제윤 시인 - 안산시 풍도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4.12 10:48
  • 수정 2015.11.1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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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풍도로 건너왔다. 풍도의 행정구역은 경기도 안산시지만 섬사람들은 오랜 세월 인천을 연고로 생활해 왔다. 자녀들도 대부분 인천에서 학교를 나와 인천에 정착해 산다. 작은 섬 풍도는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던 풍도해전이 발발한 곳이다. 구한말 일본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륙 침략의 첫 총성을 울린 곳이 바로 이곳 풍도 앞바다였다.

1894년 7월, 이 바다에서 일본의 포격으로 청나라 함선들이 침몰했고 1100명의 청나라 병사들이 수장 됐다. 청일 전쟁의 발화지 풍도.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곧이어 조선을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비극적 전쟁의 무대였던 풍도 앞바다가 오늘 비할 데 없이 평화롭다.

풍도의 주택들은 산지를 따라 층층이 앉았다. 삶의 비탈이 그대로 드러난다. 풍도 부두에서 누구보다 먼저 여객선을 맞아주는 것은 방파제에 터 잡고 사는 갈매기들이다. 선착장이 소란스럽다. 직업소개소의 소개로 섬에 어선을 타러 온 선원 한 사람이 달아나다 붙들린 것이다. 선주는 소개비를 50만원이나 주고 데려왔으니 그냥 보내줄 수 없다고 선원을 데려간다. 그가 선급금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받았다면 그의 도주는 불법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가 떠나는 것을 막은 선주가 불법이다.

이 섬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꽃게잡이를 한단. 섬에는 거의가 노인들뿐이니 배를 탈 선원을 구할 수 없어서 뭍에서 데려온다. 그러다 간혹 이런 일도 생긴 것이다. 아마도 선원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겠지. 막상 섬에 왔으나 두려웠겠지. 그래서 밥을 굶어가며 빈집에 숨어 있다가 여객선을 타고 달아나려 했겠지. 하지만 섬에서 들고나는 유일한 통로인 부두를 피해 그가 여객선에 오를 방법은 없었다.

조선 왕조 실록 <세종실록>에는 풍도(豊島)의 옛 이름이 풍도(楓島)로 기록되어 있다. 섬에 단풍(楓)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섬에는 여전히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 군락이 남아 있다. 현재 섬은 단풍나무 섬이 아니라 풍요의 섬이다. 하지만 풍도는 이름과는 달리 풍요롭지 못하다. 섬은 가파른 비탈과 산지가 대부분이라 농사지을 땅도 변변치 않고 갯벌이 없어서 바다 것도 풍성하지 않다. 척박한 섬의 환경이 풍요와는 거리가 먼데도 이름이 풍요의 섬으로 바뀐 것은 왜였을까. 풍요를 꿈꾸는 섬사람들의 열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래전 풍도 사람들은 스스로 풍요를 가꾸기 위해 멀리 떨어진 무인도를 개척해 바다 농장으로 삼았다.

그 섬이 도리도다. 풍도 사람들은 100여 년 동안이나 겨울이면 무인도인 화성군 서신면 도리도로 이주해 바지락을 캐고 굴을 깨며 살다가 이듬해 봄이면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섬사람들이 이주할 때는 온갖 살림살이는 물론 가축들까지 따라 갔다. 옮겨가는 학교를 따라 선생님과 아이들, 지서의 경찰들도 따라갔다. 도리도는 한국 최대의 자연산 바지락 밭이었다. 작은 무인도지만 썰물 때가 되면 갯벌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고 갯벌에는 바지락과 굴 등이 지천으로 널렸다. 풍도 사람들은 그 바지락 밭을 일구며 한 세기를 살아왔다.

 

 

부둣가에서 만난 할머니는 8.15 해방 직후에 황해도 옹진 소강이란 곳에서 이 섬으로 시집을 왔다. 할아버지는 6년 전 이승을 뜨셨다. 시집 와서부터 50년 넘게 해마다 음력 9월이면 도리도로 건너가 살았다.

“음력 9월이면 굴 주으러 전체 살림 다 갖고 갔어. 여기는 한 두 사람만 남고, 동네 전체가 다 이사 갔어. 강아지 새끼, 굉이 새끼까지 다 따라다녔지. 배 몇 채에 잘름잘름하게 싣고 물, 나무 다 싣고 가야 하니 힘들었어.”

도리도에는 흙과 돌을 섞어 허술한 죽담집을 지었다. 식구가 많든 적든 방하나 부엌 하나 딸린 비좁은 죽담집에 살았다.

“식구가 열이라도 거기서 다 살았어.  
음력 9월에 도리도로 건너가 굴을 따던 풍도 사람들은 섣달그믐이 되면 다시 풍도로 돌아왔다. 한겨울 두 달 정도 풍도에 살던 사람들은 양력 2월이 되면 다시 도리도로 건너가 굴을 따고 바지락을 캐며 6월까지 살았다. 1년의 반도 넘는 시간을 도리도에서 산 것이다.

“그때 가서 일년 먹을 것을 벌어왔어.”
80년대 중반에 와서야 정부는 도리도에 집도 지어주고 선착장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풍도 사람들은 도리도에 갈 수 없다. 도리도의 갯벌을 영영 잃고 말았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풍도는 옹진군에 속했다가 안산시로 편입되었지만 도리도는 여전히 화성군에 속한 무인도라는 것이 화근이었다.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강화되자 화성군 사람들은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풍도 사람들의 도리도 출입을 막아버렸다.

책상머리에 앉은 행정 관료들은 실정도 모른 채 섬들의 행정구역을 편의대로 나누고 붙였다. 풍도가 화성군이 아니라 안산시에 편입된 것도 풍도 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지만 그로인한 피해는 순전히 풍도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100년 동안이나 풍요를 일구던 갯벌을 잃었으니 풍도는 이제 다시 풍요와 먼 섬이 되고 말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꽃게잡이 등으로 살아가지만 100여년 동안 가꾸어온 바지락 밭을 잃은 뒤 풍도 노인들도 삶의 기운을 잃었다.

“그걸 뺏기고 억지로 사는 거예요. 일 년 들어앉았어도 돈 하나 못 보고 살아요. 여기서 안 사먹고 안 쓰고 사니까 살지. 도시라면 못 살지. 쌀 두어 가마니면 일 년을 사니까. 반찬거리는 심어서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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