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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청춘 금방 가버려 애들도 늙구만"

강제윤 시인 - 진도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5.24 10:46
  • 수정 2015.11.11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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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버스터미널, 팽목항으로 가는 막차는 끊겼다. 하룻밤 읍내에서 유숙을 한다. 무작정 읍내시장 골목을 어슬렁거린다. 어느 골목쯤이었을까. 문득 시간이 멈춰진 듯한 풍경과 맞닥뜨렸다. 지금은 진열장에 아무것도 없는 낡은 가게. 반쯤 열려진 격자 문 안, 할머니 한분이 바닥에 주저앉아 저녁밥을 먹고 계시다. 그 쓸쓸한 생의 풍경 앞에 나그네는 무너졌다. 그리고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언뜻 저 할머니는 진도홍주를 만드는 분이 아닐까 생각이 스쳤다. "할머니, 혹시 여기서 홍주 빚으세요?" 할머니는 말없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으로 나오니 가게 앞에 입간판이 하나 서 있다. 세상에! 이 집은 진도홍주 국가예능보유자 허화자(전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선생의 집이었다. 나이 팔십, 손수 홍주를 빚어 온 세월만 50년이 넘었다. 할머니는 처음 본 과객에게 밥상을 차려주지 못하는 것을 연신 미안 해 하신다. "밥은 자셨소. 못 자셨지. 내가 허리가 안 아프면 김치하고 국하고 밥을 차려줄텐디. 허리가 아파 내 밥도 잘 못 해먹어요. 미안하요."

할머니는 열여덟 살에 결혼을 했다. 바람난 남편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청상 아닌 청상이 되어 혼자 아이들을 길렀다. 그 무렵 얹혀살던 숙모에게 홍주 빚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홍주명인의 술도가는 초라하다. 그이가 사는 집이 그대로 술을 빚는 작업장이기도 하다. 50년 세월을 부엌에서 장작불을 때 술을 내렸다. 누룩을 빚고 청주를 띄운 뒤 8시간 이상을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펴서 고조리(고소리) 주둥이로 이슬 같은 술을 한 방울씩 받아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고조리 주둥이 부근에 지초를 놓아두면 핏물처럼 진한 선홍색이 우러나 홍주의 빚과 향이 완성된다. 청주를 닷 되짜리 양동이 세 개 반 정도 솥에 붙고 불을 땐다. 그렇게 전통을 고수하며 술을 내리니 홍주는 한 번에 4되 이상을 만들지 못한다. 요새는 진도에서도 대부분의 홍주 도가들이 장작이 아니라 가스불로 술을 내린다. 한 때는 서울의 유명한 요리 집에서도 할머니의 술을 팔기도 했지만 만드는 양이 워낙 적어 그이가 만든 홍주는 좀 채 진도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에는 극성 애호가들이 진도읍내에 방을 잡아놓고 홍주를 마시러 출근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술 내리는 날은 아무 음식도 안 드신다. 혀에 다른 음식 맛이 베어들면 술맛을 모르게 될까봐서다. 화장한 여자들은 고소리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한다. 화장품 냄새가 스며들까 걱정이 돼서다. 그만큼 온 정성을 다 한다. "홍주는 빨가니 탈탈한 술이 좋아." 선홍빛 홍주 병을 햇빛에 비춰보며 하시는 말씀이다. 홍주는 투명한 것보다 약간 탁한 것이 지초가 제대로 우러난 술이라는 것이다. 1984년경이었을 것이다. 간경화를 앓던 판화가 오윤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조카와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던 오윤은 젊은 시절부터 진도를 드나들며 홍주를 마셔댔었다.

그 오윤이 "다 죽게 돼서 다시 진도로 왔어. 내가 방을 얻어 줬지." 오윤은 숯댕이처럼 까만 얼굴로 매일 그 독한 홍주를 마셔댔다. 징하고 독한 술만 마셔대니 얼굴은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죽음을 재촉하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윤이 친구라고 소개하며 어떤 여자를 데려 왔다. 그 여자와 또 홍주를 마셨다. 그러고 사나흘쯤 지났을까 시커멓던 얼굴이 붉어지며 화색이 돌았다. 할머니는 오윤의 얼굴빛을 찾아준 것이 홍주였는지 그 여자였는지 지금껏 알 수가 없다. 그도 아니면 홍주와 사랑의 합작품은 아니었을런지. 오윤이 몸이 좋아져서 진도를 떠날 무렵 그림을 하나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 했었다.

"당숙님(남농 허건) 그림 아니면 그림이라 생각을 안했었거든. 그때는 오윤이가 그라고 유명한 사람인줄 몰랐었소. 착하고 좋은 사람인디 너무 일찍 죽어부렀소. 여 와서 수양하고 몸 좋아져서 다 나아서 갔는디 그라고 죽어부렀소."

그후 오윤은 판화 한 점을 보내왔다. 지금은 해남 사는 큰 딸이 소장하고 있는 '진도 고모'가 그것이다. 가을 어느 비오는 날 술을 빚어야 하는데 날은 춥고, 어찌해야 하나 걱정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할머니는 요즘 허리가 너무 아파서 술 만드는 일을 잠시 쉬고 있다. 할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면 손으로 빚는 홍주의 맥이 끊길까 걱정이다. "다들 편하게만 살라고 안하요. 잘난 척 하면 쓰겠소만. 내가 해도 너무 잘 된 술은 팔기 싫어요. 내가 죽으면 이것도 없어질 것이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어서 밥 먹으러 가시오. 여는 일찍들 문을 닫아. 늦게 가면 밥 없어."

나그네는 밥보다도 할머니가 만드신 홍주 맛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 졌다. 하지만 그 어렵게 만든 귀한 술을 파시라 하기가 여간 미안하지 않다.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니 돌아오는 답이 단호하다. "안 돼. 밤에 술 먹으면 못써요. 아침에 와. 밤에 독한 술 먹으면 죽어. 술에 맞아 죽든가. 술 먹고 싸우다 맞아 죽든가. 아깐 술을 함부로 낭비하면 쓰는가."칼날 같은 말씀이 살 속을 파고든다.

"술로 아깐 세월 탕진 하지 마시오. 청춘 금방 가버려. 애기들도 늙구만." 아프다. 칼끝이 심장에 가까워질수록 간절함도 깊어진다. 밤에 마실려는 것이 아니구요. 아침 첫배로 관매도엘 들어가거든요. 아침에는 경황이 없을 듯해서요." "관매도? 육십 두 살 묵은 우리 애기, 야닯살 묵어서 갔응께 거가 지금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겄소." 지금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관매도 이야기에 할머니 마음이 움직였다. 일전에 빚어둔 홍주는 부엌 한 귀퉁이 플라스틱 말 통에 담겨 있다. 유리병 하나를 꺼내 따르니 불빛 아래 선홍빛이 더욱 진하다. 나그네의 혈관은 벌써 흥분해 있다. 혈관을 따라 핏빛 홍주가 스며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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