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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왜구들이 소작까지 하던 왕족들의 유배지

강제윤 시인 - 강화 교동도 기행 - (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6.07 09:50
  • 수정 2015.11.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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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강화군 교동도는 민간인 출입 통제선(민통선) 안의 섬이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각각 2킬로미터씩 뒤로 물러난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 안의 지역이 비무장 지대다. 민통선은 비무장 지대 남방 한계선에서 다시 남쪽으로 5~20킬로미터 사이에 그려져 있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 육군 8군 사령관이 직권으로 그어놓은 선이다. 미국 군인이 한국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하지만 한국인들에게 민통선은 법보다 무서운 강제력을 가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장(戰場)에서 무력은 법보다 우위에 있다. 교동은 북의 황해도 연백과 강화도를 사이에 두고 드넓다. 연백과는 불과 5킬로미터 거리. <택리지>에서 "깊고 넓으며 한없이 크다"고 한 곳이 바로 교동과 강화 일대다.

"교동도와 강화도 두개의 큰 섬이 바다 가운데 일자로 가로 뻗어 남쪽으로는 바다를 막았고, 북쪽으로는 한강 하류를 담아, 은연중에 앞 산 너머를 둘러싸서 깊고 넓으며 한 없이 크다. 동월(董越)이 '평양과 비교하여 더욱 짜임새 있다'고 한 곳이 바로 여기다."(택리지 '산수')

지금은 면단위 행정 관청이 있는 한적한 섬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교동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에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할하는 해군 사령부, 삼도통어영까지 있었다. 교동과 강화는 오랜 세월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관문 역할을 했다. 왕성의 관문이었던 교동은 강화와 함께 서남해의 어느 섬보다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다.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선과 세곡선의 길목이었던 때문이다.

1360년 왜구는 강화에서 백성들 300여명을 살해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 갔고 1371년에는 고려의 병선 40여척을 불태우는 등 끊임없이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왜구의 침략에도 기울어 가던 고려의 조정은 무능했다. 정규군이 맞섰지만 제대로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하고 전멸 되거나 도주하기 일쑤였다. '교동군지'에 따르면 심지어 왜구들이 교동도에 장기간 주둔하며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아가기까지 했다 한다. 고려 왕성을 코앞에 두고 왜구들이 섬을 직접 통치한 것이다.

교동은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유독 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교동이 왕족 전용 유배지가 된 것은 늘 대규모 군대가 주둔해 있고 왕도인 송도나 한양과 가까운 섬이었기 때문이다. 특급 유형수들을 감시하기에 교동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1221년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21대 왕 희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는 세종의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이 그의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됐다. 광해군의 형이었던 임해군 또한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된 뒤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 7년에는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뒤 불태워져 죽었다. 그 외에도 광해군의 왕비였던 유씨와 왕족이었던 은언군, 익평군, 영선군 등이 교동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온 조부 은언군을 따라왔던 철종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교동도에 살았다.  

하지만 이 땅 어느 곳처럼 교동 또한 역사 유적은 거의 자취도 없다. 과거 관청이 있었던 읍내리에는 교동읍성 성문 한 곳의 홍예문만이 간신히 남아 있다. 이 읍내리에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유배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것은 중종 반정 직후인 1506년 9월이었다. 연산군은 교동에서 불과 두달 남짓 유배 생활을 하다 급사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실록'은 연산군 폐위부터 유배, 사망까지의 일들을 속보로 전한다. 반정의 순간까지 기미도 못 채고 주연에 빠져 있던 연산의 처신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왕위를 뺏기고도 목숨을 살려준 동생 중종의 성은에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온갖 호사와 권력을 다 누려본 자라도 삶에 대한 미련은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인가.

"전왕을 교동(喬桐)에 안치(安置)하였다. 밤 2고(鼓)에 봉사(奉事) 안윤국(安潤國)이 와서 아뢰기를, "폐주는 갓[笠]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고 나와서, 땅에 엎드려 가마에 타며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 했으며....."( 중종 1년, 1506년 9월 2일)

반정의 핵심 인물 박원종은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동생이었다. 연산군은 큰어머니 박씨 부인을 겁탈했고 박씨 부인은 목을 매 자결했다. 박씨 부인의 동생 박원종이 집안에 치욕을 준 '왕'을 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실록의 기사는 연산군이 교동에 유폐되는 순간과 유배지의 풍경을 스틸 사진처럼 정교하게 전한다. 유배지 교동에서도 연산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운지 연신 감격한다.

새 임금은 '패악'한 전 왕에 대해 혈육의 정마저 끊기 어려웠던가 보다. 물품을 보내고 가시 울타리를 3미터쯤 뒤로 물리게 하는 성은을 베푼다. 하지만 중종 또한 머지않아 조카들을 죽인 패악한 왕이 될 터였다. 패악한 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제권력의 속성이 패악한 것이다. 삼촌은 우환거리를 없애기 위해 조카들을 몰살시킨다. 연산군의 외가였던 고을과 왕후 신씨의 고향 마을은 반정의 피해를 입고 강등 당하고 연산군이 좋아하던 물품의 교역도 금지된다. 연산군은 스스로의 목숨을 그토록 귀히 여겼으나 유배지에서 목숨의 보전은 쉽지 않았다. 교동 유배 두어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하자 왕은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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