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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선정비를 세우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선정의 증거

강제윤 시인 - 강화 교동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6.14 11:05
  • 수정 2015.11.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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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소재지에서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고구리 마을이다. 마을은 교동의 너른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다. 교동은 강화에서 논이 가장 많은 면이다.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2만여 평에 이른다. 고구리 저수지를 지나 마을 숲으로 들어선 것은 물푸레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디선가 천년목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확인해보니 물푸레나무는 400년 수령의 보호수다. 천년목이 아니어도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했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 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는 우주목 신화가 널려 있다. 중국의 <산해경>에도 우주목이 등장한다.

"건목(建木)이 있는데 태로가 하늘을 오르내렸고 황제가 가꾸고 지켰던 나무다."(산해경, '해내경')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소설을 통해 어려서 들었던 '나의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의 숲에는 사람들마다 '나의 나무'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은 뿌리를 통해 모두 '나의 나무'에게로 돌아간다. 사람은 세속에 있으나 나무는 신령한 세계에 속한다.

한국의 우주목 신앙은 마을마다 산재해 있었다. 지혜 깊은 이 땅의 당산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의 안녕과 사람의 안전을 보살피는 신목이었다. 하지만 유일신교의 유입 이후 당산 신앙을 비롯한 이 땅의 토착 신앙은 초토화 되었다. 당집이 헐리고 당산나무가 베어진 것은 이 땅의 정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주목이나 당산나무 신앙 등의 토착 신앙은 결코 미신이 아니다. 그것을 미신이라 배척한다면 세상에 배척당하지 않을 종교는 없다. 본디 미신 아닌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삼한 시대 교동과 강화는 마한의 옛 땅이었다. 후일 백제에 점령되었다가 광개토대왕 대에는 고구려의 점령지가 됐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이 설치되어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그 때의 이름이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점령 된 뒤에는 교동현이 되었다. 조선조 말엽까지도 교동은 다섯 개의 면을 거느린 군이었다.

본래 교동도는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 개의 각기 다른 섬이 간척공사 등을 통해 하나의 섬으로 연결 되었다. 교동을 비롯한 인근의 강화도나 석모도 등에 유난히 '떠내려 온 섬'에 대한 전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산기슭에서 발견되는 화석이나 조개껍질 등은 교동의 옛 지형을 말해 주는 증거다. 조선 개국 초에는 개성의 왕씨들을 다른 섬으로 이주시킨다고 속여 교동 앞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곳이 청지펄이다.  

읍내리 교동 향교로 가는 길목에 비석들이 군집해 있다. 조선 시대, 교동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안내판은 이 비석들을 "조선 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 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겸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선정비인데 교동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직도 선정비가 선정을 베푼 자들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선정을 베푼 관리들이 저리도 많은데 어찌 백성들의 삶은 온통 고통뿐이었을까.

많은 비석들이 수령들이 떠나기도 전에 서둘러 세워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거의 소실되고 없지만 예전에는 교동 전 지역에 비석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가소롭게도 교동의 통치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손'으로 선정비나 영세불망비를 남긴 것이다. 선정비는 실상 통치자들이 자신의 악정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가 많다. 선정비를 세우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선정의 증거다. 하지만 못된 전통은 현대에 와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어느 고을을 가나 군수, 시장 이름의 비석 하나 없는 곳이 없다.

읍내리 비석군에서 직진하면 화개산 중턱에 화개사가 있고 교동향교는 그 오른 쪽 끝자락 산기슭에 자리해 있다. 교동향교는 이 땅에서 최초로 공자의 초상화가 봉안된 향교로 알려져 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귀국 도중 교동향교에 공자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향교는 문이 굳게 잠겨 있고 향교 안 마당에는 태극기만 나부낀다. 향교 대성전 건물 서쪽에는 성전 약수가 있다. 약수터 물이든 샘물이든 땡볕에 바가지로 땀을 쏟은 나그네에게는 모두가 감로수고 약수다. 안내판에는 '위장병 환자가 마시면 단기간에 완쾌된다고 전해진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학전(學田)이었을까. 향교 입구 논에서는 벼가 막 피기 시작했다. 향교 서쪽에는 논에 물을 대는 물방죽이 있다. 방죽에서 논으로 고무호스가 연결되어 있다. 예부터 향교에 딸린 논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을 것이다. 양반 유생들이 공부하던 향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유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노비와 농민들이 농사짓던 논이나 저수지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교는 죽은 교육 기관이지만 저수지와 논은 여전히 살아있는 유물이다. 실상 저런 저수지나 논이야말로 이 땅 농업 문화의 귀중한 유적이고 문화재가 아닌가. 저 논이 사라지면 저 작은 방죽도 순식간에 매워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가뭇없이 사라져간 이 땅의 문화 유적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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