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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항일의 성지, 소안도

강제윤 시인 - 완도군 소안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7.12 08:18
  • 수정 2015.11.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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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화흥포항에서 소안도행 여객선에 오른다.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지만 아직 피서객들은 많지 않다. 그래도 모처럼 여객선은 활기차다. 뱃전에서 웃고 장난치고 신이 난 아이들. 휴가철이 끝나면 여객선은 다시 고요해 질 것이다. 선실 바깥 나무 의자에 섬 노인들이 나와 앉았다. 노인들은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다음 주에 오기로 한 당신 손주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휴가철이 와도 고향에 올 수 없는 자식들 걱정을 하는 걸까. 안개 속에서 횡간도의 사자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정상의 바위가 사자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나그네는 저 동물이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아니면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자면 어떻고 호랑이면 또 어떠랴. 무엇이건 움직일 수 없는 돌사자, 돌 호랑이에 불과 한 것을.

과거 소안도는 인근의 노화, 보길과 한 생활권이었다. 완도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소안도는 자연히 육지가 된 완도 생활권으로 편입됐다. 고립된 섬이 육지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낭만적 흥취를 자아내지만 섬사람들은 늘 육지를 지향한다. 섬의 육지에 대한 열망은 가히 절대적이다. 과거 섬사람들은 고립으로 인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와 교통이 원활 하지 않을 때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사람들은 스스로 남 3면(완도 남부에 있는 세 개의 면)이라 부르며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교통이 좋아진 지금은 그런 공동체 의식이 거의 사라졌다.

소안 항에 내리면 섬의 역사를 알리는 비석 하나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항일 성지 소안도.' 비석에서는 어떤 긍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소안항에서 2킬로 남짓 들어가면 면소재지인 비자리다. 비자리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비석 세기가 서 있다. 영세 불망비. 두 기는 제주 목사의 것이다. 제주 목사는 부임길에 소안도에 들러 어떤 치적을 남겼던 것일까. 비자리 선창머리에는 늙은 어부 한 사람이 낡은 목선을 수리 중이다. 어부는 부서진 배 후미에 각목을 대고 못질을 한다.

“통발을 막을라고, 배가 없으께 우선 이놈을 고치요. 보길도에다 쌔내기 한 대를 사 놨는데 아직 못 갖고 왔소.”

기관이 배 바깥에 달린 선외기를 여기서는 보통‘쌔내기'라 부른다. 일반 기관 배는 경유를 쓰지만 모터가 달린 선외기는 휘발유로 가는 고속선이다. 노인은 낙지 통발 어업을 한다. 어부들은 비자리 앞바다 갯벌에 줄지어 서 있는 '마장'에 통발을 매달아 낙지를 잡는다. 낙지 통발에는 장어도 들고, 게도 들고, 볼락 같은 작은 물고기도 든다. 노인은 못질한 각목을 배 후미에 맞춰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다듬는다. 노를 저어서 가는 배, 섬 사람들이 ‘노전배’라고 부르는 작은 목선을 아직껏 부리는 어부는 드물다. 목선과 어부는 바다에서 함께 늙어 버렸다. 펄쩍, 망치질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목선 바로 앞에서 숭어가 뛴다.

“내다 버릴 것인디, 우선 바닥에 나가서 일할 배가 없어논게. 낼부터 낙지 통발 들어 가께. 이라고 고처 쓰요. 이 배만 한 이 십년 썼소.”

비자리 어민들은 7월 말부터 11월까지 마을 앞 바다에서 통발 어업에 종사 한다. 수협의 입찰이 시작되면 도시의 중간상들이 들어와 낙지를 사간다. 작년에는 1킬로에 4500원까지 갔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작은 것 1킬로면 10마리 남짓. 어부가 마리당 450원 정도에 파는 낙지를 소비자들은 두세 마리 한 접시에 이삼 만원씩 주고 사먹는다. 어부의 손을 떠나면 낙지의 몸값이 열배 스무 배 씩 뛰는 것은 시간문제다. 통발을 매는 마장은 해마다 제비뽑기를 통해 새로 분배 한다. 낙지가 잘 드는 곳이 있고 덜 드는 곳 있기 때문이다.

“좋은 디가 있고 나쁜 디가 있고, 잘 난 디가 있고 안 난 디가 있지라우. 그래 제비뽑기를 안 하요. 그래야 무법천지가 안되지라우.”

노인은 낙지 통발이 끝나면 바다에서는 별달리 해먹을 것이 없다. 젊은 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양식으로 큰돈을 벌지만 노인들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인들은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낙지 통발에 기대고 산다. 노인은 통발이 끝나는 철이면 건축판에 막노동을 나간다. 섬에서도 노인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아이고 생활하기 힘들어요. 힘들어.”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 항일운동 기념탑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시대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 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했다. 이준화는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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