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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날궂이 멸치 잡다가 떼죽음 당한 섬 사람들

강제윤 시인 - 통영 용초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8.09 09:31
  • 수정 2015.11.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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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도로를 따라 용초마을로 간다. 옛길은 흔적도 없고 자동차 한대 다니지 않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괴물처럼 깔려있다. 자연스런 해안 경관을 죽이고 터무니없이 크게 깔아놓은 도로는 폭력이다.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토목 업자의 공사를 위한 도로다. 두 마을 사이는 걸어가도 10분 남짓이니 이런 길에 주민들이 차를 몰고 다닐 일은 거의 없다.

주민들이 아니라 도로 공사용 트럭들 지나다니기 편하라고 만든 길. 섬 주변 어장에서 물고기가 고갈되는 것은 바다와 섬이 만나는 해안선을 단절시킨 저런 도로의 영향도 크다. 섬에서 흘러내려오는 유기물들이 도로에 의해 차단되니 먹이가 없어 물고기들도 더 이상 섬의 해안을 찾지 않게 된 것이다.

해안도로의 중간쯤, 바닷가에 한산초등학교 용호분교가 있다. 아직도 학교가 남아 있는 섬은 행복하다. 용초와 호두, 두 마을의 첫 글자를 따서 학교 이름을 지었다. 처음에는 서로 자기 마을에 학교를 유치하려 힘겨루기도 했겠지. 그 타협으로 생긴 것이 두 마을 중간지점인 이곳이겠지. 이 아름다운 바닷가 분교는 장진영과 박해일 주연의 영화 '국화꽃 향기'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대학 독서 동아리 회원이던 희재(장진영)와 인하(박해일)는 여름방학 봉사 활동으로 이 학교를 찾아와 아이들에게 독서지도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진영은 영화 속에서 위암으로 죽어갔다. 그것도 일종의 시참같은 것이었을까. 영화 속 희재의 운명처럼 장진영 또한 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아니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는 것이니 무엇도 미래를 예시할 수는 없다. 그녀는 우연히 운명과 조우한 것이겠지.

용초마을 앞 바다에도 수상가옥들이 즐비하다. 이 섬도 어류양식을 많이 한다. 모두 열채, 한집은 운영이 어려워 양식장을 그만 뒀고 지금은 아홉 집이 주로 우럭을 키운다. 넙치는 하지 않고 참돔과 농어는 약간 키운다. 우럭을 많이 키우는 것은 추위에 강한 때문이다. 컨테이너 건물 앞에는 자가용 배들도 한척씩 묶여 있다. 날이 저문다. 수상 가옥에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저 집에서 외국인 선원들이 먹고 잔다. 이제 그들도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저녁 준비를 하겠지.

민박집을 찾아들었다. 마침 김장을 끝낸 노부부가 화덕에 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구우며 시린 손을 녹이는 중이다. 주인은 작은 어선으로 슬낚기(외줄 손낚시)를 한다. 도다리와 참돔, 볼락 등을 주로 잡는다. 자연산 어류를 잡지만 양식산과 수입산 때문에 값은 형편없다. 육지의 횟집들에서는 자연산이라 해서 양식보다 몇 배 비싼 값에 회를 팔지만 어부들은 양식이나 자연산이나 같은 값에 활어를 넘긴다. 판로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바다에서 나는 이익은 고스란히 중간상인과 횟집 주인들 몫이다. 비진도처럼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용초도도 큰 피해를 입었다. 열세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육십 여 채의 가옥이 침수되고 23척의 어선이 파손됐다. 그래서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다. 그때 주인은 집에 있었다.

"눈치도 못챘어. 라디오도 없었으니 몰랐지. 집에 가만 앉았는데 초저녁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더라고. 그날 멜치는 또 얼마나 많이 났다고. 겁나게들 잡아왔어. 그기 날궂이 멜치였던거라." 추석날이었다. "새벽에 때려 쌓는디. 그때는 방파제도 없었어. 파도가 마을로 넘어와 집이 무너져 죽은 사람도 있었고."

태풍이 몰려오니 멸치떼도 이를 눈치 채고 살기위해 해안 가까이 피신하는데 사람들은 제 죽음이 코앞에 닥쳐와도 눈치 못 채고 멸치가 많이 든다고 좋아하고만 있었다. 대체 사람이 미물인 멸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일까.

용초도는 또한 근처의 추봉도와 함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분산된 포로가 수용됐던 섬이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에 적극 가담했던 포로 2천여 명이 수용됐다. 전쟁 후 강제 소개됐다 돌아온 주민들이 마을을 복구했지만 아직도 곳곳에 그 아픈 흔적들이 남아 있다. 주인은 어렸지만 여전히 군대가 진주해오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가 보리가 막 익어 보리타작할 때쯤이었어. 해변에 이상한 물체가 나타났어. 젤 처음에는 잠수부들이 왔었어. 지금 생각해보니 유디티 같은 거라."

포로수용소를 만들기 위해 미국 군함이 상륙정을 싣고 왔었다. 작은 배로 수심을 재고, 잠수부들이 물을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현장 조사를 한 군인들은 돌았다가 몇 개월 뒤 들이닥쳐서 "마을을 완전히 밀어버렸다."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용초마을 주민들은 통영이나 호두마을, 그도 아니면 인근 섬으로 강제 소개됐다. 마을은 하루아침에 포로수용소가 되어버렸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3년 뒤에야 주민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주민들은 폐허 위에 다시 집을 짓고 농토를 일구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국가는 주민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함께 강제소개 당했던 추봉도 사람들과 보상을 받기 위해 시도를 해봤지만 시효가 지나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다. 4대강사업 같은 대형 토목사업에는 법을 무시하며 수십조의 돈을 쏟아 붓는 나라가 억울한 국민들이 보상을 요구하면 법을 핑계로 외면하기 일쑤다. 주인은 잘 구워진 고구마 몇 개를 봉지에 담아준다. "미리 챙겨두시오. 낼 혹 딴 섬에 갔다가 점심 못 먹을 지도 모르니." 섬에서는 돈이 있어도 식당이 없어서 밥을 못 사먹는 일이 많다. 그것을 알고 미리 챙겨 주시는 것이다. 주인의 따뜻한 배려가 고맙다. 용초도에서 나그네는 고구마가 아니라 섬의 마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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