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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섬에 일 년만 살면 술이 서너 배는 늘어요”

강제윤 시인 - 군산 명도, 말도, 방축도 기행(상)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8.15 21:02
  • 수정 2015.11.1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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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온통 모순 덩어리 삶이다. 생명을 유지 시켜주는 산소가 생명을 파괴하는 노화의 원인이 되고 삶을 사는 일이 삶을 소진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삶의 대가로 끝내는 목숨을 지불해야 하는 삶.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태초부터 초월을 꿈꾸었다. 초월의 공간, 유토피아는 대게 깊은 산 속이나 머나먼 바다 어디쯤에 있다고 믿어졌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세계의 비밀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유토피아의 꿈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지상을 벗어나 하늘에 있다고 믿어져 온 천국은 또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우주선 따위 기계의 도움이 없다면 사람은 지구를 떠나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 머릿속은 수만리 창공을 날아다니는 우주적 상상력으로 가득하지만 하늘은 결코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 창공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천국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수만 번 불러도 소용없다. 맨몸으로 하늘에 오른다면 대기권을 벗어나는 순간 사람은 얼어 죽거나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늘은 결코 사람의 편이 아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천사들이 아니라 적천사(敵天使)들이다.

심산유곡과 함께 유토피아의 한 원천이었던 섬. 이제 더 이상 섬도 꿈꾸던 섬은 아니다. 개발의 탐욕으로 섬은 상처를 입고 섬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육지 사람들의 위락 시설로 바뀌어 가고 있다. 섬을 잃는 것은 이상향을 잃는 일이다. 고군산(古群山) 군도(群島)의 많은 섬들도 지금 고난에 직면에 있다.

새만금 갯벌을 죽인 뒤 갯벌에 쌓여야 할 펄들이 밀려와 섬의 바위에 쌓인다. 해초가 자라지 못하니 전복이나 해삼 등 바다 생물들의 살길이 막막해 졌다. 명도 섬사람들 또한 그렇다. 20여 가구가 사는 명도에는 어선이 10여척. 오로지 어로만이 생계의 수단이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진 뒤 이 바다를 찾는 물고기들도 반 이상 줄었다. 사람이 먹는 해산물들의 3분의 2 이상이 갯벌이나 염습지에서 생의 일부를 보낸다. 갯벌이 사라졌으니 어장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농경지에 비해 100배 이상 생산성이 높은 갯벌을 없애고 농지를 만든 어리석음의 결과다.

이 섬사람들도 반살이를 한다. 어로가 없는 겨울철이면 군산으로 나가 살다가 봄이 되면 되돌아온다. 섬사람들은 전복 가두리 양식 따위를 시도 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 했다. 겨울철 수온이 찬 탓이기도 하고 양식에 쓸 다시마나 미역 등의 해초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해녀들이 해삼이나 소라 등을 잡지만 오늘 같은 사리 때는 물살이 쌔서 물질을 못한다. 사내 둘이 어로에 쓸 정치망을 손질하고 있다. 한 사람은 선주, 또 한 사람은 선원이다.

“공기는 좋은데 술을 너무 마셔서 탈이지. 고기가 안 잡히면 짜증나서 먹고, 잡히면 기분 좋아서 먹고. 핑계거리가 좋아요. 안주도 좋고. 술 못 먹는 사람도 섬에 1년만 살면 술이 서너 배는 늘어요.”

섬살이의 즐거움도 술이고 고통도 술이다. 사내는 유명 관광지로 금싸라기 땅이 된 이웃 섬 선유도가 부럽기도 하고 못 마땅하기도 하다.

“선유도는 자리싸움 같은 걸 많이 해요. 인심도 사나워 졌고. 모든 게 돈이에요. 전에는 더러 놀러 가면 밥이라도 한 끼 먹고 가라고 붙잡고들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어 졌어요.”

부두에는 젊은 내외가 홍합을 손질하고 있다. 홍합은 배를 타고 나가 사리 때 물이 많이 빠지는 섬 주변의 바위에 붙은 것을 따온다. 끌을 들고 바위에 붙은 홍합을 떼어낸다. 작업은 하루 서너 시간 정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한 사리에 칠팔일 따는 때도 있지만 보통은 한 달에 열흘 남짓 딸 수 있을 뿐이다. 개홍합이라고도 하는 잔 홍합은 물이 많이 빠지지 않아도 바위마다 가득하다.

하지만 개홍합은 아무도 따지 않는다. 종자 자체가 워낙 작고 속에 알맹이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 손길이 가기 쉬운 해안 바닷가에 개홍합이 번성하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몸의 기름기를 빼고 사는 것도 삶을 누리는 한 방편인가.

부부는 알이 없는 홍합을 골라내고 크고 작은 것을 분류한다. 크기에 따라 가격차도 크다. 하지만 부부는 홍합의 주인이 아니다. 어촌계에서 주민 한사람에게 섬의 홍합 채취권을 팔았다. 부부는 고용 되서 일한다. 어민들은 수협 위판을 기피한다. 가격이 낮기 때문이다. 일반 수집상이 가격을 더 높이 처 준다. 상인도 군산보다는 부산 쪽 상인들이 더 높은 값에 사간다. 부산 지역이 홍합을 더 귀하게 치기 때문이다.

나그네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잘 해주던 부부는 홍합의 주인이 나타나자 입을 다문다. 같은 섬사람들끼리도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는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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