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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사막의 섬, 옛날 소흑산도에 가다

강제윤 시인 - 신안 우이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9.06 11:40
  • 수정 2015.11.1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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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2시 20분, 도초항에서 섬 사랑 6호를 탄다. 우이도까지는 서남쪽으로 10여 킬로 바닷길을 더 가야 한다. 우이도는 신안군 도초도의 새끼 섬이다. 그러나 도초도의 새끼섬 우이도 또한 더 작은 새끼 섬, 동소우이도와 서소우이도에게는 어미 섬이다. 사람에게만 피가 흐르랴. 섬들도 모두 크고 작은 핏줄로 이어진 혈육 지간이다. 우이도는 과거 흑산진의 관할이었다. 일제가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명명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이라 불렸다. 자산 정약전도 흑산도 유배시 겨울이면 흑산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우이도로 건너가곤 했다. 우이도가 흑산진의 위수 지역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진리 포구는 방파제 공사 작업소리만 요란 할뿐 드나드는 사람은 적다. 우이도에 오는 여행객들은 모두 모래언덕이 있는 돈목이나 성촌으로 드나든다. 진리 포구에 구수한 젓갈 냄새가 진동한다. 멸치젓갈을 삭히는 드럼통 여섯 개가 나란하다. 진리도 옛날에는 수군의 진이 있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섬에 다니면 가장 흔하게 접하는 이름이 진리, 진촌, 읍리, 읍동 등의 이름이다.

읍리는 섬의 행정 관청이 있던 마을이고 진리는 수군이 주둔 하던 마을이라 보면 된다. 비금도에는 효자비가 많더니 우이도에는 열녀비가 여럿이다. 밀양 박씨, 상원 김씨 열녀비가 길 가에 정렬해 있다. 선정비가 유난히 많은 섬들도 있다. 유행을 따르는 풍습은 시대를 초월한다.

우이도는 서소우이도 보다 면적이 열배 이상 크고 인구도 많지만 학교가 없다. 진리에 있던 분교가 폐교된 뒤 아이들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늙은 섬이 되었다. 교육청에서는 취학 아동이 없어지면 학교를 폐교 시키지만 아이들이 생긴다 해서 다시 학교를 열어주지는 않는다. 폐교는 쉬워도 개교는 어렵다. 학교가 없는 섬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길은 요원하다. 섬은 점점 늙어 가고 무인도가 되지 않더라도 내내 늙은 섬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진리마을에서 돈목이나 성촌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험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십리 산길. 5진리 고개 마루 부근에서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산길을 새로 낼 계획이다. 진리 고개를 넘으니 산 속에 너른 분지가 나타난다. 할머니 한분이 지팡이에 의지에 힘겹게 산길을 오른다. 돈목에서 오시는 길이다. 할머니는 저 느린 걸음으로 족히 두 시간은 걸어왔을 것이다.

산에는 산열매들이 익어간다. 으름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고 가막사리는 시큼하다. 구지 뽕 나무 열매는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머루는 설익은 것이 반이다. 산머루와 구지뽕 열매를 따서 갈증을 채운다. 가을 산길을 가는 즐거움의 반은 산열매들이 준다.

산속에 빈집 두 채가 보인다. 돌담만 남은 집터도 여럿이다. 전봇대를 보니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살았을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노인들도 이승을 떠나면서 마을은 폐촌이 되었을 것이다. 떠나간 노인들은 저승의 어느 산골짜기 양지 녘에 또 집을 짓고 머무시는 것일까. 빈집은 두 채만이 아니다. 빈집과 담장들, 여기도 한때는 제법 흥성한 마을이었다. 농사짓던 산밭도 제법 넓다. 나무를 때고 곡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우이도의 부촌이었을 것이다.

마을은 20 여 년 전에 폐촌 된 대초리. 500여 년 전 우이도에 처음으로 생긴 마을이었다. 흑산도에서 건너온 자산도 바람을 피해 이 산속 마을에서 겨울을 났던 것은 아닐까. 시간이여! 가장 오래된 것을 가장 먼저 사라지게 만들었구나. 바닷바람을 덜 받는 산속이라 그런 것일까. 마지막 사람이 떠난 지 20여년이 지났다는데 집들은 조금만 손보면 살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다. 빈집, 광에 놓인 항아리들도 성하다. 괘종시계는 11시 15분에서 바늘을 멈추었다.

시계가 멈추고 난 뒤에도 시간은 또 얼마나 무심히 흘러갔던 것일까. 문간방의 낡은 재봉틀만 홀로 녹슬어 간다. 저 망가진 재봉틀처럼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사람도 생애도 되돌 길은 영영 없다. 재 너머 도로 공사장의 포클레인 소리가 산중의 적막을 깬다. 이제 곧 도로 공사 장비들이 산길을 파헤치고 넘어와 집터와 옛길을 쓸어버리면 누가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사실을 기억이나 할까. 흔적 있음도, 흔적 없음도 모두 부질없으나 기억마저 사라져버린다면 어찌 애달프지 않으랴.

이 고개를 넘으면 돈목, 성촌 마을이다. 산 아래 모래밭과 바다는 청옥 빛으로 푸르다. 모래 언덕이 있는 성촌마을 해변에는 금도치 전설이 서린 굴이 있다. 고운 최치원의 탄생 설화인 금도치 설화가 이 섬에도 전해진다. 우이도와 고운의 인연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다. 고운이 우이도에서 난 것은 아니나 이중환의 <택리지>는 당나라 유학길에 고운이 이 섬에 기항 기항했을 가능성을 전한다. 신라 때부터 우이도는 중국으로 가는 항로상에 있었다.

<택리지>는 영암의 구림이나 월남 마을을 출항한 배가 흑산도, 홍의도, 가거도를 거처 중국에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배들이 순풍을 만나면 6일 만에 당나라의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했다고도 하니 중국과의 최단거리 항로로 각광 받았음 직하다. 장삿배를 타고 이 길로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 등은 모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 했다. 하지만 풍랑이라도 만나면 흑산도로 항해하던 배가 가까운 우이도에 피신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과 신라를 오가는 길에 고운이 우이도와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충분 한 것이다.

성촌마을에는 우이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만든 사막 같은 모래 언덕이 있다. 하지만 나그네는 성큼 산을 내려갈 수 없다. 나그네는 사막을 찾아 우이도에 왔는가. 사람을 찾아 왔는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길은 가면 있으나 사람은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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