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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아내는 바지락 캐고 남편은 낚지 잡고

강제윤 시인 - 당진 대난지도 소난지도(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09.27 09:01
  • 수정 2015.11.1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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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에 두고도 섬들 사이의 소통은 쉽지 않다. 난지도에서 소난지도 가는 길도 그렇다. 소난지도는 당진 도비도와 난지도 사이의 중간 항로에 있지만 오가는 길에 모두 들르지 않는다. 난지도로 오는 뱃길에만 들르기 때문에 난지도에서 소난지도로 바로 건널 수가 없다. 그래서 난지도에서 소난지도엘 가려면 도비도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배를 타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궁즉통. 도비도행 여객선에 오른 뒤 선원에게 사정을 한다. 끝내 거절하지 못한 선원이 선장에게 부탁해서 소난지도 뒤 안 선착장에 내릴 수 있게 해 준다. 고마운 일이다.

소난지도는 아주 작은 섬인데도 대형 펜션과 콘도들이 여러 채다. 해안가에 또 몇 채의 펜션들이 들어서려는지 공사 중이다. 마을은 고요하다. 모두가 갯벌에 나갔다. 할머니들은 바지락을 캐러 갔고 할아버지들은 낙지를 파러 갔다. 어촌계에서 관리하는 섬의 공동 양식장은 한해 바지락 채취가 끝나고 종패들이 뿌려 졌다. 내년 봄까지 어린 바지락들은 몸집을 키울 것이다. 주민들은 모두 부두 건너 무인도 우무도 갯벌에서 작업 중이다.

여름 한철에는 이 섬도 피서객들로 넘쳤겠지. 민박집도 여러 채다. 민박집 담장에는 통바지락, 깐바지락 얼린 것, 바지락 젓갈 판매라는 안내문이 써져있다. 이 섬에도 한때는 아이들만 30여명이 넘었던 적도 있지만 이제 섬은 늙고 퇴락했다. 30여 가구에 40명 남짓한 노인들만 산다.

마을에 남은 노인 한 분을 만난다. 노인은 건너 무인도 우무도의 점토 광산에 품 팔러 왔다가 소난지도 여자와 만나 결혼하고 눌러 살았다. 40년 전이다. 광산일이 끝난 뒤에는 배를 탔다. 섬은 한때 실치잡이로 유명했다.

"옛날에는 여기 살 매놓고 고기잡이했어."

갯벌에 어살을 설치해 실치 만이 아니라 조기도 잡고 멸치도 잡았다.
"당산에 시루 쩌놓고 제를 올렸다."
당제에 뱃고사에 섣달과 정월이면 온 섬이 부산했다.
"옛날부터 여가 배썩이 좋아. 오만 배들이 다 들어왔어."
배썩은 배 세우기 좋다는 뜻이다. 무인도로 둘러쌓여 피항 하기 좋은 소난지도에는 바람이 불 때면 온갖 배들이 몰려와 배를 댔다. 더 오랜 옛날에도 섬은 세곡선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풍선들이 전라도 큰 들 만경 그런데서 세곡을 싣고 가다 바람을 만나면 꼭 여기 들렀다고 그래. 암만 바람이 불어도 여가 배썩 하나는 최고였거든."

다 지나 간 옛이야기다. 이 바다에서도 고기가 떠난 지 오래 됐고 더 이상 피항선도 세곡선도 사라진지 오래다. 섬이 여름철 피서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이 섬사람들도 기대가 컸다. 다들 민박을 처서 생계에 큰 보탬이 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외지인들이 들어와 대형 펜션을 짓고 영업을 하면서 부질없어 졌다.

"우리 같이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어쩌다 자고가지. 젊은 사람들은 다 시설 좋은 데로 가. 원래 살던 사람들은 다 틀렸어. 조개나 캐고 굴이나 따먹지."

어느 섬이나 개발로 이득을 보는 원주민은 드물다. 옛날 섬들은 육지의 권력에게 억압당하고 왜구나 해적들의 노략질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떠날 수 없었다. 이제 섬 사람들의 터전은 외래 자본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외래 자본이든 토착자본이든 해안 풍경을 가리는 높은 건물을 세우는 것은 섬이 가진 경관과 전망을, 해변을 사유화 하는 것이다. 섬마을 공동의 재산을 독점 하는 행위다. 그들은 땅의 일부만을 산 것이지 마을이 가진 경관 가치를 산 것은 아니다. 어느 때 보다 경관의 가치가 높아진 시대지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적다. 그렇다면 저 대형 팬션들이 마을 공동체의 공동 재산인 경관을 이용해 해변에서 벌어들인 이익의 일부는 마을공동체에 귀속되는 것이 옳다.

선착장 뒷산 전망 좋은 해변에도 터가 닦여져 있다. 아마 여기에도 팬션이 들어 설 것이다. 숲의 초입은 싸리나무 군락이다. 싸리나무들 틈에서 반가운 열매가 눈에 띈다. 보리수 나무열매가 주홍빛으로 익었다. 한웅큼 따서 입에 털어 넣는다. 새콤달콤하고 약간 떫기도 한
과즙이 입 안 가득 고인다.

우무도에서 낙지잡이를 하고 나온 사내는 소난지도에 들어와 산지 6년 남짓 됐다. 사내는 오랜 세월 밖으로 떠돌았다. 사우디 등 중동 지방을 13년 동안이나 오가며 돈을 벌었다. 그때 모은 돈으로 자동차 정비공장을 세웠다. 그렇게 한세월이 가는가 싶었는데 IMF를 만났다. 한 삼년을 버티다 끝내 접었다. 식당을 열었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식당이란 게 오늘 오픈 하면 내일 간판 내리는 거여. 그래서 흔히 하는 말대로 프리랜서라고 개인적으로 다니면서 버는 게 제일 편해. 사람 상대 안하고 편해."

그래서 섬으로 들어와 정착했다. 지금은 마음이 편하다. 아내는 바지락을 캐고 사내는 낙지를 잡으며 산다.

"바지락 파면 하루 5만원 벌이는 하거든. 낙지 물대 나가면 못 잡아도 이삼십마리는 잡아."

사내는 낙지를 잡아다 도비도의 식당이나 회집에 넘긴다. 마리당 삼사천원씩 하니 상당한 소득이다.

"5만원이 많아서가 아니라 육지 안 나가면 돈 쓸 일이 없으니 안 써서 남는 거지. 여기는 그냥 몸만 건강하면 직장 있어. 물 쓰면 바다에 나가 벌어오고 그렇게 사는 거지."

사내는 지금의 삶이 더 없이 만족스럽다.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떠돌다 정착한 섬이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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