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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남자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강제윤 시인 - 인천 장봉도 기행(하)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2.10.18 08:38
  • 수정 2015.11.1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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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 진달래가 피었다. 10월 말에 진달래라니! 철모르고 늦겨울에 일찍 피는 개나리는 더러 봤으나 가을에 핀 진달래는 처음이다. 한반도의 기후대가 확연히 변한 듯하다. 팬션을 지으려는 것인지 산자락 한 무더기가 잘려 나갔다. 할머니 두 분이 산밭에서 일한다. 한 분은 끝물 고추를 따고 한분은 괭이로 밭을 일군다. 노인들의 일하는 모습을 잠깐 보고 있는데 갑자기 돌맹이 하나가 날아온다. 깜짝 놀라 피한다. 하마터면 정강이뼈에 금이 갈 뻔 했다. 할머니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나그네를 책망한단.

“어째 거기 있어요. 큰일 날 뻔 봤시다.”

할머니가 밭을 일구다 돌을 골라내 버렸던 것이다. 할머니는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보도 않고 담 밖으로 개숫물을 버렸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물벼락을 맞기도 했시다. 밭 일 하는데 옆에 있는 것 아니시다. 열에 아홉은 다쳐.”

밭일에 몰두하다보면 돌을 골라내 버리면서도 지나가는 사람 신경 쓸 틈이 없는 것이다. 할머니는 괭이로 밭두둑을 만든다. 밭에다는 마늘을 심을 것이다.

산 고개를 넘어 혜림 재활원 앞을 지난다. 재활원에는 100여명의 정신 지체 장애인들이 생활한다. 마을에는 농원과 민박집이 여럿이다. 농원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끼룩끼룩 소리가 들린다. 민박집에서 뭘 기르나. 별 생각 없이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머리위에서 소리가 들린다. 이런! 기러기 떼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제 신도를 걸을 때도 이동하는 기러기 떼를 만났었다.

오늘 만난 무리는 제법 규모가 크다. 삼각 편대와 일렬종대로 이동하는 기러기 떼가 여러 무리다. 녀석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시베리아나 사할린에서부터 수만리 하늘을 날아왔을 것이다. 한참을 날아가던 기러기들이 이번에는 모두 한 대오로 모여 날아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두 무리로 나뉜다. 기러기들은 기류나 상황에 따라 대오를 바꿔 가며 날아가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날아온 저 기러기들은 러시아 어느 병사들의 영혼일까. 고단한 영혼들은 또 어느 세계로 넘어가는 것일까. 러시아 민요 ‘기러기’를 부르며 무리에서 떨어진 기러기 한 마리 산길을 넘는다.

 


한 고개 너머 또 너머로 보인다
한 조각 구름 속에 잠긴 둥근 달
그 파리한 달빛에 어린 밤의 적막이
드높이 자란 갈대밭에 드리우는데
기러기 한 떼 줄지어 난다
처량히 울며 줄지어 난다
그 슬픈 추억 지닌 채 저 산 너머로
기러기 떼 줄지어 난다

한 포기 풀이 바람에 흩날리듯
한 줄기 재가 바람에 흩날리듯
수많은 목숨 앗아버린 총탄 자욱이
산허리를 수놓아둔 채 말이 없는 채
기러기 한 떼 줄지어 난다
처량히 울며 줄지어 난다
그 슬픈 추억 지닌 채 저 산 너머로
기러기 떼 줄지어 난다.

장봉도의 들녘에도 막바지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논의 벼들은 수확이 끝났고 밭에서는 고구마 수학이 한창이다. 사람들이 고구마 순을 걷어내고 나면 쟁기를 단 경운기가 고구마 밭을 갈아엎는다. 노인들이 고구마를 주어서 흙을 털고 20킬로들이 종이 박스에 차곡차곡 담아 나간다. 고구마는 공동 출하 되거나 길거리에서 관광객들에게 팔리기도 한다. 이 섬에도 과일은 포도 농사가 많다. 마을의 집들마다 장대에 걸어둔 망둥어가 말라가고 있다. 출장 나온 공무원인 듯 보이는 사람 몇이 슈퍼 앞 탁자에 앉아 마른 망둥어를 구워 소주를 마신다.

기러기 떼가 날아간 하늘 아래, 바닷길로 삼목 행 철부선이 장봉도를 떠난다. 무리에서 낙오되어 날지 못하는 기러기 한 마리도 배낭을 메고 배를 탔다. 단체 관광객들이 배에 오른다. 남겨온 김밥을 마저 먹고 캔 음료를 마시고 남자들은 장봉도 횟집에서 포장해온 낚지 복음을 안주로 소주를 마신다. 여자들은 새우깡을 갈매기들에게 던져 준다. 이 바다의 갈매기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이 유희다. 초로의 관광객들은 부부 동반. 갑판에서는 한 여자가 남자에게 경고한다.

“주책 좀 부리지마, 주책 좀 부리지마.”

여자는 화를 삭이는 표정이 역력하다. 술이 거나해진 남자는 궁색하여 말이 없다. 지은 죄 탓이다. 남자는 부둣가에서부터 혼자 배를 기다리던 중년의 여인에게 작업을 걸었다. 아내를 내팽개치고 여자를 따라온 남편은 선실에서 작업을 걸고 나오다 아내에게 딱 걸렸다. 앞에서 지키고 있어도 틈만 나면 옆길로 새는 남자 때문에 여자는 평생 무던히도 속이 썩었을 것이다. 늙어도 남자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객선이 떠나면 멀어지는 것은 섬이고 남겨지는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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