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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사람을 살리는 윈시의 숲

강제윤 시인 - 거제 내도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3.14 12:54
  • 수정 2015.11.1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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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도 숲길 입구 산비탈에는 오래된 동백나무들이 신장처럼 숲을 호위하며 서 있다. 오랜 세월 모진 바닷바람을 견디며 속이 단단해진 동백나무들은 도끼날도 뚫을 수 없을 만큼 견고하다. 이 겨울, 철갑옷으로 무장한 동백나무들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적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숲길 초입은 약간 가파르다.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비탈을 오르는 어려움을 덜어준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오른쪽 비탈에는 편백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솟아올라 내도 숲의 위용을 자랑한다.

나무가 울창한 숲 1ha가 1년 동안 생산하는 산소는 무려 5톤에 달한다. 사람 18명이 일 년 동안 숨 쉴 수 있는 양이다. 저 숲 1ha가 해마다 열두 명의 목숨을 살린다. 숲은 마치 “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대체 몇 사람의 목숨이나 살려 봤느냐.”고 묻는 듯하다. 하지만 숲은 제 한목숨 부지하기에도 급급한 나약한 인간을 타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험한 세상 “살아내느라 수고했다. 어서 오라.”고 품을 열어 감싸주고 등을 다독여준다.

측백나무과의 편백은 일본이 원산지지만 이 땅에 뿌리내려 백년을 살았으니 이미 토속의 나무가 되었다. 모든 나무는 자신을 나쁜 세균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어물질들을 뿜어내는데 이를 통칭해서 피톤치드(phytoncide)라 한다. 편백나무의 경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보다 세배 이상의 피톤치트를 뿜어낸다. 피톤치드는 인간에게도 이롭다. 인체에 기생하는 나쁜 병원균과 해충, 곰팡이들을 퇴치시켜준다. 피톤치드를 인체가 받아들이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또 면역력이 높아져 감기나 비염, 천식 등 질병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피톤치드란 구소련 레닌그라드 대학의 토킨 박사가 그리스어의 ‘식물(phyton)’과 ‘죽인다(cide)’는 단어를 합성해서 만든 용어인데 토킨 박사는 “숲에서 나는 향기로운 냄새가 바로 피톤치드이며, 식물이 주변 미생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내뿜는 방어물질이다”라고 피톤치드를 정의했다. 내도 숲의 편백나무는 많지 않고 편백숲 구간은 짧지만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나그네의 몸과 머리를 정화시켜 주기에는 충분하다.


섬의 면적이 작으니 내도의 숲길은 전체가 3km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짧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원시의 숲을 오래 즐기고 싶다면 보폭을 최대한 늦춰야 마땅하다. 급하게 걸으면 숲길은 금방 끝나고 만다. 그러면 나그네는 도 섬 밖으로 내쫓김 당하고 말 것이다. 내도의 숲에서는 느리게 느리게 달팽이나 거북이처럼 걸어라. 내도가 거북섬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은 형상 때문이 아니라 작은 섬이라 빨리 다닐 필요가 없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거북이나 달팽이처럼 느리게 걸으면 숲이 주는 혜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몸속의 나쁜 기운들은 너 많이 빠져나가고 숲의 정령들이 불어넣어주는 맑은 기운으로 몸은 더 충만하게 되리라.

편백숲을 지나면 다시 미끈하면서도 우람한 근육을 지닌 동백나무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발레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침묵의 소리다. 편백보다 더 오랜 숲의 주인인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웅얼거리는 침묵의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추위가 계속된 탓에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다. 아니 이미 피었다 진 꽃들도 있으리라. 동백 꽃망울들도 한껏 움추려 숨죽이고 날이 풀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 핀다 해서 동백이지만 실상 삼동의 겨울 혹한을 뚫고 피는 동백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꽃들은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살짝 피었다가 지고 초봄이 되자 만개를 시작한다. 하지만 가을이나 봄에 피는 동백은 동백이 아니다. 엄동의 추위를 뚫고 피어야 진짜 동백이다. 눈밭에서 피어나는 설중매가 진짜 매화인 것처럼. 가을에 피는 것은 추백이고 봄에 피는 꽃은 춘백이다. 이 추위를 뚫고 피아난 내동의 동백도 몇송이쯤 있을 것으로 나그네는 확신한다. 그들이야말로 진짜 동백이니 만약 그 동백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그네는 결코 따듯한 봄볕아래 피어나는 동백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리라.

동백나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숲의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누가 또 숲을 걸어오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검은 염소다. 염소는 이 숲이 기르는 숲의 자식이다. 숲은, 숲의 나무들은 풀이 말라버린 겨울에는 제 몸의 살을 뜯어 염소를 살찌운다. 내도와 공곶이 마을 사이 바다에서 잔물결을 일으키고 온 바람이 내도의 숲을 흔든다. 오수에 빠져 있던 숲이 흠짓 놀라 잠을 깬다.

바닷가 숲에서 부는 바람에는 바다의 소리가 담겨있다. 그래서 섬이나 바닷가 숲의 생태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더러 바닷바람에 숲이 일렁이는 소리를 듣고 파도 소리를 들었다고 우기기도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지만 바람소리를 파도 소리로 잘 못 들은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어찌 바다에서 불어오는 섬의 숲을 지나는 바람에 파도 소리가 묻어 있지 않겠는가. 바람은 바다와 숲의 전령이다. 바다와 숲은 바람의 도움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서로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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