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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바다도 숲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데’

강제윤 시인 - 거제 내도 기행(3)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3.21 09:27
  • 수정 2015.11.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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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숲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문득 깨닫는다. 바다도 숲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데 대체 나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이가 세상에는 몇이나 될까. 어쩌면 우리가 눈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나의 안부를 알아달라는 절실한 호소가 아닐까. 자신의 존재가 잊혀 질 때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도 없는 사람들의 세계. 인간은 기계가 없으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아주 사라져 버린 것일까. 사람들이 이처럼 메트릭스 속에서만 빠져 산다면 마침내 인간은 기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들끼리 교감하는 능력을 아주 상실하고 말 것이 자명하다. 더 늦기 전에 인간이 숲으로, 섬으로, 바다로 가야할 이유다.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상한 스승이다. 우리가 더 자주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품속에 안긴다면 자연은 틀림없이 우리가 잃어버린 교감 능력을 되살려 줄 것이다.

가파른 계단의 끝자락, 구실 잣밤나무 아래는 사람 형상의 바위 하나가 서 있다. 일전에 내도에 왔을 때 그네는 저 바위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위는 마치 아이를 업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애개업개 바위라 명명했었다. 사람이 사람이나 사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이름이란 자신과 타자를 구분하기 위해 붙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나그네는 그것이 사랑에 대한 갈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사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면 나에게서는 사랑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난다. 내가 이름 지은 것 앞에서 어찌 사랑을 숨길 수 있으랴. 연인들이 서로에게 애칭을 붙여 부르길 즐기는 것도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애칭은 사랑이 더욱 팔팔 끓게 만드는 촉매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숲에 입주해 사는 식물들은 다양하지만 동백나무, 편백나무만큼이나 지분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족속은 소나무 종족이다. 소나무는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던 나무다. 섬김을 받던 나무다. 때로 사람보다 더 높임을 받던 나무다. 궁궐이나 전함을 짓기 위해 보호받던 봉산의 소나무를 몰래 베는 사람은 때로 제 목이 날아갈 만한 징벌도 각오해야 했다.  

옛날 통영의 어떤 통제사는 화재로 집을 잃은 백성들을 위해 봉산의 소나무를 베어다 집을 지어주었다는 이유로 파직이 되기도 했었다. 소나무는 원래 이름이 솔나무였다. 거느릴 솔자 소나무이니 이름처럼 그 위세가 대단했던 나무임은 분명하다. 숲에는 나그네가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나무도 있다. 육박나무가 그렇다.

이 나무는 흰색은 아니지만 자작나무처럼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 육박전이라도 하고 온 것일까. 아, 저기 때죽나무도 있네. 내 어린 날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나무다. 우리는 어린 시절 때죽나무로 개울에서 천렵을 했다.

열매를 따다 돌로 짓이겨 웅덩이에 풀면 민물고기들이 배를 허옇게 뒤집고 둥둥 떠올랐다. 때죽나무에 있는 마취 성분 때문에 민물고기들이 기절을 한 것이다. 그렇게 잡은 민물고기는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물고기를 떼로 잡는다 해서 때죽나무라 한다고 안내판에 설명이 되어있다. 나그네는 저 나무가 왜 때죽나무란 이름을 얻었는지 오늘에야 알았다.

동백나무 숲 터널을 빠져나오자 오래된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이제 숲길의 막바지다. 솔밭 사이 비탈진 언덕 양지녘엔 무덤들 몇 기가 나란히 누웠다. 섬에서 태어나 섬에서 살다 섬에서 죽어간 이들의 무덤. 봉분들은 일제히 해변을 향해 봉긋 솟아 올라있다. 해변의 묘지 앞길에서 길은 세 갈래 길이다.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씩의 문제를 안고 섬으로 온다. 섬의 숲을 걸으며 자신과 대면하며 문제를 풀어나간다.

이제 저 어린 염소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동백나무 터널을 빠져 나가면 숲길은 끝이 나고 나룻배는 다시 우리를 뭍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그네들에게 숲의 정령이 속삭인다. 절망을 이고 온자 절망을 털어버리고, 슬픔을 안고 온자 슬픔을 날려 보내고 고통을 이고 온 자 고통을 벗어 버려라. 시인 발레리는 그의 시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했다. 바람이 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살아가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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