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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욕지도의 명물 고구마와 밀감

강제윤 시인 - 통영 욕지도 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4.04 08:18
  • 수정 2015.11.1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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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지도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욕지도의 진면목은 해변에 있지 않다. 해변에 가면 섬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욕지도만이 아니다. 어느 섬이든 섬을 온전히 보고 싶으면 섬의 산에 올라야 한다. 욕지도를 찾는 사람들은 주봉인 천왕산에 올라야 진짜 욕지도를 봤다 할 것이다. 가장 높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는 데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발길이 날렵한 사람은 30분만에도 오를 수 있다.

욕지도에는 천왕봉(392m)을 비롯해 대기봉(355m), 약과봉(315m), 일출봉(190m) 등의 여러 산이 있다. 산에는 등산로가 잘 나 있어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에 오르지 못할 형편이라면 혼곡 마을 등산로 입구에서 노적, 통단마을 까지 이어진 해변 트래킹길이라도 꼭 걸어볼 것을 권한다. 탁 트인 바다와 오솔길을 번갈아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여행자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황홀하다.

천왕봉은 옛날부터 섬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긴 산이다. 섬사람들은 산기슭의 제당에 천왕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동항마을 위 상수원 저수지 기슭에는 아직도 산신당이 있다. 천왕봉은 최근까지도 천황봉이라 불렸다. 본래 천왕봉이었는데 일제 때 천황봉으로 바뀌었다가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의 산 이름은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했다. 천왕봉의 천왕은 사천왕의 그 천왕이다.

섬 전체가 산악지형인 욕지도에는 아름다운 숲도 많다. 그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숲은 자부포의 메밀잣밤나무 군락지(천연기념물 343호)다. 우리나라 난대림에서 자라는 잣밤나무는 대부분 구실잣밤나무고 메밀잣밤나무는 희귀하다. 욕지도에는 그 귀한 메밀잣밤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욕지도는 논이 거의 없고 비탈 밭이 많다. 밭은 끈적한 찰황토가 아니라 물이 잘 빠지는 마사토에 가까운 황토밭이다. 그래서 고구마 농사가 잘 된다. 욕지 고구마는 해남 화산 고구마만큼이나 달고 맛있다. 한 때 술의 주정으로 헐값에 수매 되던 고구마가 이제는 비싼 작물이 된 것이다. 넓적하게 잘라서 말린 고구마인 ‘빼떼기’로 끓인 빼데기죽도 유명하다.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 하는데 욕지도 고메 막걸리는 고구마 케잌 속의 고구마 속살보다 더 달콤하다. 운이 좋으면 욕지도의 할머니가 집에서 직접 담근 고메 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다. 욕지항 선창가 붕어빵 수레에서 막걸리를 병에 담아 파신다. 진짜 섬의 전통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 않는 내가 기피하는 두 가지 음식이 고구마와 꽁보리밥이다. 어려서의 기억 때문인가. 오랫동안 먹지 않았으니 지금쯤 다시 입맛이 돌아올 때도 됐으련만 아무리 시도해 봐도 여전히 고구마와 꽁보리밥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섬에서 살던 어린 시절, 보리와 함께 고구마는 섬사람들의 주식이었다. 고향 섬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불렀다. 감자는 북(北)감자라 했다. 가을이면 밭에서 캐낸 고구마를 씻은 뒤 납작하게 잘라 말리는 일로 분주했다.

'시달캐미'라 부르던 절광 고구마. 자른 고구마는 딱딱하게 말린 뒤 소주의 주정으로 수매했다. 겨울철 식량으로 남긴 고구마는 방안 한쪽에 대나무 칸막이를 만들어 보관했다. 고구마와 사람이 한방에서 잤다. 너무 따뜻하면 싹이 나고 너무 차면 얼어서 썩어버렸다. 고구마 광이 바닥나고 남겨둔 종자용 고구마에서 새순이 돋기 시작하면 봄이 왔다.

또 하나 욕지도의 명물은 밀감이다. 사람들은 제주도에서만 밀감이 나는 줄 알지만 남해안의 거의 모든 섬들에 밀감나무가 자란다. 욕지도의 밀감 재배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토질을 조사한 후 시험재배하면서 시작됐다. 노지에서 나는 욕지도 밀감은 달고 새콤한 맛이 야생의 맛 그대로다.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 해마다 찾는다.

일주도로를 걷는다. 세밑, 겨울바람이 차다. 해넘이를 보러온 관광객의 승용차들만 드물게 지나갈 뿐 도로에 다니는 차가 거의 없다. 칼바람 속이지만 자동차의 위협을 받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걷지 못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라. 자동차 따위는 뭍에서나 타는 것이다. 섬에서는 무조건 걸어야 한다.

유동 마을 부근 절벽 위에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무슨 사당일까. 재실일까. 건물 안이 그을려 있다. 불이 났던 것일까. 건물 앞으로 열녀문이 서 있다. 열녀를 모시는 사당인가.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극락도'란 영화의 세트였다 한다. 사당 안, 벽에는 불에 타다 만 열녀의 초상이 흐릿하다. 열녀의 얼굴에는 한이 서려 있다. 왜 아니겠는가. 먼저 간 서방님 따라가야 하는 청상과수에게 어찌 한이 없겠는가. 더구나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정혼자의 집에 들어와 모진 시집살이 견디다 목숨을 끊은 여인이었다면 그 한은 또 얼마나 깊을 것이냐.

이 열녀각이야 영화 속의 장소 일뿐이지만 때때로 만나게 되는 열녀문이나 열녀각에서 나는 자주 열녀의 비애를 본다. 더구나 그 열녀가 약을 먹거나, 목을 매거나, 절벽에 몸을 던지지 않고 이십일, 삼십일 씩 곡기를 끊고 마침내 굶어 죽은 열녀라면 그 비애는 더 크게 전해져온다. 그 죽음 이면의 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단숨에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길을 두고 그리도 오랜 날을 굶주리며 서서히 죽어 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녀가 곡기를 끊은 것은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살고 싶다는 항변이 아니었을까. '나 이렇게 죽어 가고 있으니 살길을 열어 달라'는 절규였겠지. 단식은 저항의 수단이지 자살의 방편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흔했던 것처럼 망해가는 가문의 부활을 위해 '열녀 되기'를 강요당하고 감금된 채 죽어간 여인들이라면 그 비애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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