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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영국군대에게 점령당했던 거문도

강제윤 시인 - 여수 거문도 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4.25 09:25
  • 수정 2015.11.1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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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리에 한국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8.15 해방 직후부터다. 일본인들이 살다 떠난 집들을 적산 불하 받았다. 일본인들은 "얼마 있다가 곧 올테니 잘 관리하고 있으라" 당부 하고 떠났지만 헛된 꿈에 불과했다. 거문리에는 아직도 일본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겉모양은 바뀌었어도 골조는 그대로다. 저 노래방 건물도 일식 목조 건물을 개조 한 것이다. 노래방 건물에는 나까끼지라는 일본인이 살았었다. 그는 거문도의 어패류를 수집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중개상이었다.

"한 십 년 전만 해도 나까끼지 아주머니가 여길 찾아오곤 했는데, 자손들 데리고. 요즘엔 발 딱 끊어 버렸네. 죽어 부렀는가 어쩐가."

거문리 부둣가에는 제법 큰 어선들이 수 십 척 정박해 있다. 어로를 준비하는 그물 손질이 바쁘다. 하지만 큰 어선들은 대부분 거문도 배가 아니다.

"저 배들은 거의 여수 같은 타지 배들이고 여기 배는 몇 척 안 되요. 사실은 요거이 새우 조망이라고 고대구리 저인망 단속을 심하게 하니까 새우조망 허가를 받아서 나오는 것인디. 허가 기간이라 해야 불과 이 삼 개월 밖에 안 되요. 나머지는 불법 조업이지. 다들 단속 대상이에요. 어떤 섬들은 주민들이 단합해 갖고 그물로는 일체 고기를 못 잡게 하고 낚시만 하게 한다든데. 그래야 어장도 살리고 바다도 보호되고 그럴텐데 그게 잘 안되요."

해경이 단속을 하지만 어린 물고기까지 싹쓸이 하는 저인망 불법 어업의 근절은 쉽지가 않다.

"적발 돼봐야 몇 백 만원 벌금 내빌고 또 잡으면 금방 벌어 빌제. 그라이 고대구리가가 근절이 안 돼. 그러니 고기가 씨가 마르재."

어초를 심어 어장을 살리려는 정부의 노력도 있지만 노인은 성과에 대해 부정적이다. 거문도 어초 사업은 실패 했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물속에 안 들어가 봤으니 알 수가 있나. 백 개를 넣는다고 해놓고 백 갤 넣는지 열 갤 넣는지. 거기다 어초 넣는 것도 순 엉터리야. 어디가 뻘 구석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우에서 쌔려 넣어버려. 거기가 고기가 살 만한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집어넣기만 하지."

어초를 넣어 물고기를 키워도 불법 조업을 하는 고대구리 배들이 어초 주위를 그물로 둘러싸서 싹쓸이 해가는 통에 남아나지 않는다. 게다가 찢겨진 그물이 어초에 쌓이면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 정부나 어민들만이 아니다. 노인은 낚시꾼들도 큰 문제라고 생각 한다. 낚시꾼들이 쓰는 밑밥이 바다 속 백화 현상의 또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밑밥에 파우더 같은 걸 섞어 뿌리니 그게 방부제라 밑밥이 썩지도 않아. 해초가 없으면 고기는 살아진당가."

그렇다고 낚시꾼들이 찾아오는 것을 말릴 수도 없어 주민들 끼리 밑밥 규제 논의가 있었다. 낚시 배 주인들의 반대로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즈그도 묵고 살라고 그라는디 어쩔 것이여. 한동안 대립이 되가지고 인심만 나빠지고."

어족이 고갈되면서 요즈음은 거문도를 찾는 낚시꾼들의 수도 많이 줄었다. 낚시꾼들은 가까운 바다가 죽으면 더 먼 무인도와 여 등을 찾아 나선다. 물고기가 떠난 바다는 적막하다. 죽어가는 바다를 보며 노인은 깊이 탄식 한다.

"십 수 년 전만 해도 밑밥을 안 넣어도 고기가 많이 물렸는데 요새는 밑밥을 주고 홀케도 고기가 없어. 나 살자고 후손의 바다 죽이는 일이요."

거문도 파출소 뒤 해안 길을 따라 6백 여 미터를 가면 영국군 수병 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화강암 비석과 나무 십자가, 두 개의 묘비가 서 있다. 이곳에 영국군 수병 셋이 누웠다. 화강암 묘비에는 영국군의 거문도 점령 당시인 1886년 6월 11일 폭탄 사고로 죽은 수병 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나무 십자가는 영국군이 물러간 후에 묻힌 영국군 병사의 묘다. 나무 십자가 묘지의 주인은 1903년 10월에 사망한 군함 알미욘 호의 수병 알렉스 우드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떠난 후에도 1930년대까지 항해 도중 이 섬을 드나든 것으로 전해진다.

1885년 4월,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핑계로 영국 내각은 중국 주둔 함대 사령관 윌리암 도드웰 해군 제독에게 거문도 점령 명령을 내렸다. 거문도 내해는 수심이 깊어 큰 군함의 정박이 가능하고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천연의 대피항이다. 게다가 대마도와 제주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인은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거문도는 오랫동안 영국과 러시아 두 제국이 눈독을 들였다.

1885년 4월 15일, 영국 군함과 수송선은 거문도를 점령한다. 영국제국주의 해군은 1887년 2월까지 거문도에 주둔한다.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다. 영제국주의는 러시아 견제를 핑계로 거문도를 점령했지만 조선영토를 식민화 하려는 야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거문도가 점령당한 사실을 20 여 일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 40여 년 전에 이미 해군 함정 사마랑호를 동원해 제주에서 거문도까지 해역을 한 달 여에 걸쳐 정밀 탐사한 바 있다. 그 당시 영국 해군성 차관이었던 해밀턴의 이름을 따 거문도를 해밀턴 항으로 이름 붙이기도 했다. 거문도 점령 후 영국군대는 사람이 적게 살던 고도에 군대 막사를 짓고 항만 공사를 했다. 테니스 코트와 당구장 등도 이때 처음 거문도에 생겼다. 2년 동안 거문도 주민과 영국 점령군은 비교적 사이좋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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