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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외래신의 거문도 완전정복

강제윤 시인 - 여수 거문도 기행(3)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5.02 14:12
  • 수정 2015.11.1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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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치료약을 공급하고 노임을 지불해 가며 공사 일을 시켰다. 섬 주민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한 영국군의 유화 전략이었겠지만 조선 왕조 하에서 강제 부역에만 종사했던 섬 주민들은 그것을 고맙게 여겼다. 섬 주민들은 영국군과 협상 차 거문도에 온 조선 정부의 대표 엄세영에게 "자기 백성을 지켜주지도 못하면서 노임 받고 일하는 것을 방해 한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 왕조 지배 세력의 섬에 대한 수탈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자 재빠른 일본 상인들은 서도에 유곽을 만들었다. 구전에는 영국 수병들이 밤중에 헤엄을 쳐서 유곽으로 가다 빠져 죽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이곳 해변의 묘지에 묻힌 수병들은 어떻게 죽어 갔을까. 군사 훈련 중 폭발 사고로 죽은 것인지 거문리 마을 노인의 말처럼 "영국 놈들이 밤에 몰래 술 먹을라고 헤엄쳐오다 빠져 죽었"는지 오늘의 우리가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은 없다. 병사들의 죽음이란 대체로 신비와 용맹의 이름으로 미화되어 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이없는 죽음도 군대의 명예를 위해 조작되기도 한다. 이 묘지의 주인들이라고 다를까.

제국주의 침략의 말단 하수인이었던 어린 수병들, 그들은 고향을 떠나올 때 이역만리 외로운 섬에 묻히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묘지 주변의 유채는 이미 만개했다. 길가 밭에 심어진 외콩 꽃도 환하게 피었다. 동백꽃은 한참 절정을 향해 타오른다. 떨어진 동백꽃들로 숲은 핏빛이다. 꽃 시절이 오는가 싶더니 꽃 시절이 간다. 한 나무 가지에서도 어떤 꽃은 피어나고 어떤 꽃은 시든다. 꽃들에게도 꽃 시절은 짧다. 나그네의 고향에서 뻘뚝이라 부르던 보리수 열매는 주황빛으로 익어 간다. 뻘뚝을 한 웅큼 따서 입에 넣는다. 달고, 시고, 쓰고, 떫은 즙이 입 안 가득 고인다.

고도 거문리 선착장에서 동도 행 나룻배를 탄다. 하루 세 번 왕래하는 나룻배는 동도의 유촌과 죽촌, 서도의 장촌 등을 오가며 주민들을 거문리와 이어준다. 거문리에서 장을 보고 동도로 돌아가는 노인 셋이 나룻배에 탔다. 나룻배는 수상 택시이기도 하다. 편도 요금이 2 천 원이지만 정기 운항 시간이 아닌 때 배를 부르면 만원이다. 야간에는 비용이 두 배로 할증 된다.

나그네는 동도 유촌 마을에서 하선 한다. 요 근년 거문도에서는 쑥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약쑥으로 이름이 나 농가 소득에 큰 보탬을 준다. 암 환자가 거문도 쑥을 먹고 완치됐다는 소문이 퍼진 뒤 거문도 쑥의 주가가 부쩍 올랐다. '쑥대밭'이라는 한탄은 옛말이다. 쑥은 이제 밭에서도 한자리 크게 차지했다. 해풍에 강한 쑥이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면 잎이 바짝 마른다. 해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검은 비닐을 덮어 재배한다.


동도의 유촌 마을에는 조선말기 유학자 귤은(橘隱) 김류(金瀏)의 사당이 있다. 귤은은 퇴계, 율곡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추앙되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 밑에서 수학 했으나 출사 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고향 거문도와 청산도 등지에서 제자를 길러내며 야인으로 살았다.

1854년 4월,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다. 그 때 귤은은 만회(晩悔) 김양록(金陽錄)과 러시아의 함선에 올라 필담을 나누고 '해상기문'(海上奇聞)을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은 귤은 등에게 통상 문서를 건네며 조선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철저한 쇄국 정책을 견지 하고 있었던 까닭에 문서는 전달 될 수 없었다. 귤은은 귤은재집(橘隱齋集) 속의 <해상기문>에 러시아의 문서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푸차틴 제독의 비서관 곤차로프도 거문도 기항 후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거문도를 "마치 물속에 떠 있는 상자 같은 섬"으로 묘사 했다. 곤차로프에 따르면 러시아는 섬사람들을 배로 초대해 필담을 나누고 홍차와 빵, 비스켓, 럼주까지 대접 했으며 주민들은 답례로 생선과 물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거문도 사람들이 러시아 함선에서 대접을 받고 생선 등을 전해 준 사실은 <해상기문>이나 조선 측 기록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쇄국정책에 반하여 이양선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것이 알려지면 처벌 받을 것을 염려한 주민들이 이를 숨긴 때문일 것이다. 거문도 사람들이 외국 군함에 우호적으로 대응한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뿐이었을까. 거문도는 오랜 세월 국제 항로에 위치해 외국인들과 접촉 경험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거문도 사람들은 폐쇄적인 조선 정부에 비해 더 개방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귤은의 사당은 교회 건물 뒤편에 있다. 거문도에는 교회가 7개나 된다. 교회의 그늘에 가려진 사당은 기독교의 위세에 눌린 전통문화의 상징 같다. 그래도 사당은 대접을 받는 편이다. 섬을 오랫동안 지켜온 토착 신앙은 흔적도 없다. 섬의 당산과 당집은 더 이상 돌보는 이 없이 산 속에 버려져 있다. 외래 신의 완벽한 승리. 영국이나 러시아가 군사력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거문도 '완전 정복'의 꿈을 그들의 신이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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