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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포로수용소의 기억

강제윤 시인 - 통영 추봉도(1)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8.14 09:58
  • 수정 2015.11.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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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으면"
(버나드 쇼, '존 불의 또 하나의 섬')

통영 항 여객선 터미널 부근 식당, 나그네는 밥상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주인은 점심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메뉴는 '생선 정식' 하나뿐이지만 식당은 늘 만원이다.
밤이면 식당은 밥집의 간판을 접고 '다찌' 집으로 변신한다.
다찌 집이 돼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메뉴는 따로 없다.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유일한 메뉴.
술은 맥주나 소주 불문하고 무조건 한 병에 만원.
술값이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안주가 공짜다.
술 세병 기본 상차림에 생선회부터 생선 구이, 소라, 멍게, 새우튀김, 전복죽까지 온갖 해산물이 딸려 나온다. 술 한 병을 더할 때마다 새로운 해산물 안주가 추가된다.

해산물의 종류는 철마다, 날마다 바뀐다.
주인이 새벽 어시장에 가서 싱싱한 것들을 골라온다.
다찌 집은 한 자리에서 싼 값에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맛보고자 하는 술꾼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다.
그래서 '다찌'의 어원이 '다 있지'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다찌 집은 사철 풍부하게 해산물이 공급되는 통영 같은 어항에서만 가능한 문화다.

허름한 식당이지만 점심 예약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주인 부부는 생선을 굽고 홀 한 편에는 다듬다만 마늘쫑이 그대로 놓여 있다.
주방 쪽에서 머리에 비녀를 꽂은 노인 한분이 느리게 걸어 나와 홀 청소를 한다.
물걸레로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치우고 빈 물통에 물을 채운다.
허드렛일을 하는 노인은 팔십이 넘어 보인다. 이마는 주름이 깊고 얼굴은 까맣게 탔다.


주인의 친정어머니일까. 노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나이든 노인이 노동할 수 있는 건강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노인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힘에 부치는 노동. 노인은 혹 주인의 가족이 아니라 품팔이를 온 것이 아닐까.
시리다. 식탁에 나온 참나물도, 콩나물도, 배추 겉절이도 모두 저 팔순 노인의 손을 거친 것이다.
손님이 들기 시작하자 노인은 소리 없이 뒷문으로 사라진다.
저녁까지 살 수만 있다면 노인은 술손님 맞이를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한산도를 거처 추봉도로 왔다. 작년 여름 개통된 추봉대교로 어미 섬 한산도와 연도가 된 후 추봉도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통영-추봉도간 직항은 하루 두 편 뿐이지만 한산도를 거치면 한 시간에 한 번 씩 배를 탈 수 있다. 하루에 배가 두 번 다니는 것과 한 시간에 한번 다니는 것은 횟수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섬은 육지와의 간격이 좁혀지는 만큼 고립감이 줄어든다.

추봉도 봉암 마을 바다는 해녀들의 물질이 한창이다. 갯돌 해변은 휴가철이면 피서객들로 붐빌 것이지만 지금은 한적하다. 해녀들은 가까운 해변에 딱 붙어서 군소를 잡는다. 해삼이나 소라 전복 따위는 아주 드물다. 군소는 아직 흔한 편이다. 해녀들이 의지하는 부표는 모두 주황색이다. 통영시에서 주황색으로 통일 시켰다.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다. 바다에는 수도 없이 많은 부표들이 널려 있다. 그물, 통발, 양식장의 위치를 알려주는 부표들. 항해하는 선박들은 주황 색 부표가 눈에 띄면 근처에 해녀가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조심해서 배를 몰아 갈 것이다.

포로수용소
추봉도의 예곡, 추원 마을은 한국 전쟁 때 유엔군의 포로수용소가 있던 곳이다. 1952년 5월부터 포로수용소가 설치돼 1만 명의 공산 포로가 수용됐다. 그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다. 추봉도의 곡룡포에서 거제도는 코앞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 중 일부가 추봉도와 용초도 등지로 옮겨지면서 수용소가 생겼다. 예곡 마을에는 포로수용소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이곳에 수용된 포로들은 동란 포로 중 가장 악질적인 포로로서 막사 사이에는 2중 철망에다 원형 철조망 벽이 설치되었다."

기록이 반드시 역사적 진실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당시 포로수용소장은 제네바 협약을 어기고 공산 포로들에게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은 그에 항거해 발생한 것이다. 악질은 누가 더 악질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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