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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기생촌(女妓谷)이 예곡(禮谷)으로

강제윤 시인 - 통영 추봉도(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8.22 09:45
  • 수정 2015.11.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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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 27일 거제도 360만 평의 땅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명, 여성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17만 3천 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수용소 안에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함께 수용됐다. 포로 수용소장 F.T.도드 준장은 포로들의 본국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다. 이에 포로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수많은 포로들이 살해됐다. 그 과정에서 수용소장이 감금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그 후 일부 포로들이 인근의 추봉도, 용초도 등으로 분산 수용됐고 포로 수용소장은 해임 당했다.

예곡, 추원마을에 포로수용소가 들어서면서 마을 사람들은 인근의 다른 마을로 소개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수용소가 폐쇄된 다음에야 주민들은 재 입주 했다. 느닷없이 집과 농토와 마을을 빼앗긴 주민들은 돌아온 뒤에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열 네 살이던 마을 노인은 그 일들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때 젤 첨에 해군 다이버들이 와서 순찰해 갔어. 그리고 얼마 있다가 크나큰 배가 와서 입을 떡 벌리더라고. 그리고 이상한 차가 와서 오두막을 다 때리 빠 뿌리고. 한두 번 밀어 삘면 희뜩 넘어가고. 우리야 가만 구경만 하고 있었지. 머시 머신지도 모르고 나가라니까 나가고 그랬지."

노인은 당시 주민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것은 '군(軍)이 추봉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면서 추봉도를 무인도라고 상부에 보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기는 사람이 안사는 곳이다. 무인도라고 속이고. 그때 사람이 얼마나 살았는데. 이 섬에 학생만 380명이나 됐는데"

수백만이 죽어간 전쟁 통에 천명이 사는 섬 하나쯤 무인도로 만드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추봉도에 수용된 포로들 중에는 추봉도 사람도 있었다. 제 살던 고향마을에 포로가 되어 갇히게 된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동족상잔의 비극은 이 나라 어느 땅 한곳도 비켜가지 않았다. 노인은 예곡 마을 출신 포로는 어찌 됐는지 행방을 모른다. 추원마을 출신 포로는 석방 후 다시 고향에서 살다가 생을 마쳤다. 추봉도 포로수용소에서도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참극이 멈추지 않았다.

"똥통에 빠뜨려 죽여 버리기도 하고. 죽은 걸 똥통에다 버리기도 하고 그랬대."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수용소 건물과 도로 등의 시멘트를 걷어내고 다시 밭으로 만들었다. 그 힘든 일을 온전히 손으로만 했다.

"그 당시에는 못 묵고 살아서 밭 만든다고 허물어 삘었어. 호빡 공구리 해 논 걸 손으로 깼어."


그래서 지금 예곡 마을에는 수용소 정문 기둥만 하나 달랑 남았다. 포로수용소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노인은 그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다. 거제도 수용소처럼 관광자원이 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해서다.

노인은 마을 앞 바다에서 가두리 양식을 한다. 조피볼락(우럭)과 참돔, 각시볼락 등을 키운다.

"이깝 값도 안되요. 너무 헐해. 키는 사람, 먹는 사람들만 죽어나제. 중간에서 다 채버리고. 못 살아. 못 살아."

고생해서 키워봐야 사료 값도 안 나온다고 노인은 푸념이다. 어디서나 수산물의 이득은 중간 상인과 횟집 주인들 차지다. 어민들은 헐값에 팔고 소비자는 비싼 값에 먹는다. 그것이 바다에서만 그럴까.

"싸게 해야 먹을틴디. 서울 사는 아들내미 한테 전화가 왔어. '거기서는 야도(방어새끼) 한 마리 얼맙니까?' 해. 서울서는 야도 한 마리가 3만원씩이나 한다고. 좀 큰 거는 10만원이 훌쩍 넘고. '사묵냐?' 했지. '우짤낍니꺼.' 그래. 묵고 싶은데 묵어야지 우째. 여기서는 야도 한 마리 2천 5백원, 3천원도 못하는데."

산지에서 어부들을 떠난 물고기는 소비자에게 10배도 넘는 가격에 팔린다. '시장'의 주인은 언제나 따로 있다. '어 시장'에서도 어부와 손님은 '봉'이다. 노인은 바다 고기는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라고 일러준다.

"못해도 음력 9월은 돼야 고기에 기름기가 있어서 먹을 만하지. 여름에는 썰어 놓으면 10분도 못돼 물이 나와. 그게 다 기름이 빠지고 없기 때문이지."

예곡 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비석이 서 있다. 임진왜란 전부터 경상 우수영에서 이 마을에 관기들을 거주시켜 기생촌을 만들었다. 그래서 여기곡(女妓谷) 혹은 여곡(女谷)이라 불렸었다. 1925년 참봉 이강도 등 마을 유지들이 예곡(禮谷)으로 개칭했다. 기생촌이 예곡이 된 것은 상전벽해다. 지명 유래 설명이 없었다면 유난히도 예절바른 마을로 기억됐을 것이다. 다니다보면 이름자의 뜻풀이만 가지고는 알 수 없는 것이 마을의 내력들이다. 이 땅의 많은 지명들이 그렇다. 그러나 예곡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유래를 제대로 알려 주는 이 비석이 못 마땅하다. 자기 마을의 역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노인도 탐탁치 않은 눈치다.

"뿌셔 삐라, 해 쌓고 말들이 많구만."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그네는 사뭇 궁금하기도 하다. 다음에 다시 찾았을 때도 저 비석이 무사할까. 혹 '예로부터 예절 바른 마을이라 예곡이라 했다'는 새로운 지명 유래석이 서 있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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