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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섬들

강제윤 시인 - 울릉도, 죽도 기행(1)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8.29 14:38
  • 수정 2015.11.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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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만호 김인우는 안무사의 직을 받고 울릉도로 향했다. 안무사는 해도에 숨어든 자들을 뭍으로 압송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들었다. 연례 행사였다. 안무사는 전함 두 척에 싣고 온 군사들을 이끌고 울릉도로 진입했다. 안무사는 황토구미를 주둔지로 삼고 섬 곳곳을 뒤져 은둔한 자들을 빠짐없이 잡아 들였다.

뭍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안무사의 꿈에 동해의 해신이 나타났다. 해신은 동남, 동녀 하나씩을 두고 가라고 명했다. 다음날, 유학을 신봉하는 안무사는 해신의 명을 무시하고 배를 출항시켰다. 해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은 지상의 신인 지존의 명만을 받드는 신하가 아닌가. 왕명은 지엄했고 용궁은 멀었다. 배가 돛을 올리자 거센 풍랑이 일었다. 안무사의 전함들은 한 치 앞으로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바람은 자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안무사는 문득 동남동녀를 두고 가라고 명을 내리던 해신이 생각났다. 미신 따위에 현혹되지 않겠다던 안무사의 결심은 간곳이 없었다. 안무사는 교활한 계책을 세웠다. 섬사람들을 배에 다 태운 뒤 어린 소년과 소녀 한명씩을 불렀다. 안무사는 다정한 얼굴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애들아, 내가 잊은 것이 있구나! 필묵을 집 두고 왔단다. 혼자 가면 무서울 테니 둘이 동무해서 좀 다녀오지 않으련!” 아이들은 엄하기만 하던 안무사가 따뜻하게 말을 건네자 신이 나서 달려갔다. 아이들이 배에서 내려 집 쪽으로 사라지자 안무사는 낯빛을 바꾸고 서둘러 출항을 명했다. 바람은 이내 잠잠해 졌다.

뭍으로 돌아온 뒤에도 김인우는 늘 그때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8년 후, 조정에서 다시 그에게 안무사의 임무를 명했다. 안무사는 울릉도에 도착해 전에 그가 머물던 거처를 찾았다. 그곳에는 서로 꼭 껴안고 죽은 소년 소녀의 백골이 놓여 있었다. 김인우는 그곳에 집을 짓고 소년 소녀의 상을 모셨다. 신당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울릉도 황토구미에 있는 성하신당의 내력이다. 신당은 섬에서 흔히 보는 장군신이나 용왕신이 아니라 동남동녀 신을 모셨다. 성하 신당의 비극적 설화는 제주 마라도 애기업개당의 설화나 흑산도 진리당의 피리 부는 소년 설화와 유사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 설화 모두 뱃길을 막는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소년이나 소녀를 제물로 바친다. 재물로 바치기 위해 어른들은 모두 동일한 간계를 부린다. 교활하게도 두고 온 물건을 가져 오도록 심부름을 보내는 척 하면서 자신들만 살겠다고 배를 몰고 떠나버린다. 마라도의 소녀와 흑산도의 소년, 울릉도의 소년, 소녀는 모두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쳐 숨을 거두고 사후에는 신으로 모셔진다.


설화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인신공양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 한다. 인신 공양 과정에서 직접적인 폭력이 행사 되지 않고 간계가 등장하는 것은 그러한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신 공양은 암암리에 지속 되었고 범죄에 참가 했던 사람들은 죄의식을 씻어버리기 위해 희생자들을 신격화 시켰다. 희생자들이 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현세에서의 범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된다. 범죄자들은 희생자들의 신격화를 통해 스스로 면죄부를 받는 것이다.

밀랍으로 빚어진 성하신당의 동남동녀상은 실물처럼 생생하다. 마치 그들의 원혼이 상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눈빛이 살아있다. 황토구미 해안가에 바람이 분다. 억울하게 죽은 소년 소녀는 죽어 신이 됐어도 그들이 살던 땅에 결코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신들은 인간의 믿음 안에서만 전능할 뿐 스스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가련한 존재들이다. 바람결을 따라 물결이 인다. 사람은 가고 오지 않는데 바다는 어찌 또 이다지 애타게 일렁이는가.

조선 시대, 나라의 섬에 대한 정책은 공도정책이었다.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은 섬이란 영토를 포기하는 행위였으니 정책이라고 할 것도 없는 공허한 정책이었다. 섬은 금섬이었고 섬에 든 자는 누구나 죄인이었다. 뭍에서는 도저히 살 곳이 없어 척박한 섬에 들어가 풀이라도 뜯으며 연명해보겠다는 백성들을 조정에서는 가차 없이 내쫓아 버렸다. 나라는 결코 백성의 나라가 아니었다.

울릉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들이 마음 편히 살 땅은 어디에도 없다. 지킬 힘이 없어 조정은 울릉도를 비워버렸으나 사람들은 기어코 섬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터전을 일구고 살만 하면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잡아들여 뭍으로 내쫓길 반복했다. 사람이 살면 섬이 왜구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이 울릉도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왜구들이 울릉도를 버려두지는 않았다. 오히려 울릉도는 왜구의 소굴이 되었다. 왜구들은 무주공산에 들어와 물고기를 잡고 해산물을 채취하고 나무를 베어갔다. 울릉도에 다시 공식적인 거주가 허락된 것은 불과 130년 전이었다. 고종 19년(1882년) 개척령이 반포되면서 단절 됐던 울릉도의 역사가 다시 시작됐다. 섬은 여전히 개척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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