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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해적섬 이작도

강제윤 시인 - 옹진 대이작도, 소이작도 기행(1)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09.12 11:43
  • 수정 2015.11.1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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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자월도에서 배를 타고 소이작도로 건너왔다.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섬의 북쪽 휘청골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휘청골로 간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하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인다. 해적들의 집터였을까. 숲속에는 돌무더기들만 더러 남았다. 숲에는 또 무덤 몇 기가 있지만 관리 상태로 보아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해적의 무덤은 아닐 것이다. 숲 속을 뒤져봐도 해적의 무덤은 찾을 길이 없다.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았다면 해적들의 무덤은 비바람에 흩어져 다시 숲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서남해의 여러 섬처럼 이 섬 또한 해적 섬이 되기 이전에는 왜구의 거점이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에 현물세를 운반하던 배가 이 섬 근처에서 왜구에 의해 자주 습격을 받자 무장과 전선 80여척을 동원해 수송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동북아에서 가장 위협적인 해적은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왜구였지만 왜구가 아니라도 조선시대에는 해도에 숨어 살던 소규모의 해적집단이 있었다. 이들 해적을 포작이라 했다. 이들은 원래 양민들이었으나 관청의 수탈을 피해 섬에 숨어 살며 불법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가끔씩 왜구들과 결탁을 해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나라가 키운 도적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이 해상 지리에 밝은 포작들을 왜군과의 전투에 활용하기도 했다. 임란 이후에는 일부 포작들이 양민으로 환원 됐다. 이작도의 해적은 전란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 해적질을 했던 것일까. 그들은 끝내 양민이 되지 못하고 해적으로 이 섬에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해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하지만 인류의 해양사에서 해적과 비 해적의 구분은 무의미 하다. 강한 군사 집단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을 하고 땅을 빼앗고 백성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해적질과 무엇이 다를까. 역사가들은 이를 정복이란 이름으로 미화하기도 하지만 해양왕국의 역사가 바로 해적의 역사다. 먼저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운 해적 두목은 왕이 되고 뒤에 나타난 세력은 해적으로 이름이 남겨졌을 뿐이다.

중세 유럽의 가장 악명 높은 해적은 바이킹들이었다. 이들은 잉글랜드 섬과 러시아를 침략해 노르만 왕조와 키에프 공국을 세웠다. 16세기 대항해 시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의 악명 높은 해적이자 노예 상인 호킨스나 드레이크 등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해적이었다. 해군제독이 된 해적 두목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 제국의 세계 지배에 일등 공신이 되었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 가장 큰 위협은 일본의 해적 집단인 왜구였다. 왜구는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지방 호족인 사무라이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통솔된 수군 집단이었다. 왜구들은 중국 해안을 비롯해 한반도 연안의 각 고을을 노략질하고 강간과 납치, 방화와 살인을 일삼으며 조정의 세곡선을 약탈해 갔다.

조선시대에도 포도청 종사관과 포졸을 사칭하고 해적질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그 세력은 중국이나 일본 해적들에 비해 미미했다. 중국에서는 '관리가 되려면 먼저 도적의 수령이 되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였다. 그 격언은 여전히 이 시대 이 땅에서까지 통용된다. 어떻게든 '정치를 하려거든 먼저 돈을 벌어라.' 티켓 다방으로, 건설, 토목업으로 재물을 모은 폭력배들이 지방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되고 국회의원을 꿈꾸는 것이 이 나라 현실이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 나라를 거덜 내는 도적질만을 일삼는 것은 그들의 뿌리가 도적의 뿌리와 같기 때문이다.

소이작도에서 대이작도는 코앞이다. 뱃길로 5분. 하지만 두 섬 사이를 연결하는 배는 불과 하루 세 차례. 여행자는 대이작도로 건너가는 막배를 기다리며 콩돌 해변을 걷는다. 해변의 끝에 '손가락 바위'가 있다. 주먹을 쥐고 검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든 모습이 마치 거인의 손가락과도 같다. 거인은 무슨 까닭으로 내내 손가락 하나만을 들고 있는 것일까?

구지선사는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이었다. 선사는 누구든 불법에 대해 물으면 한결같이 손가락 하나만을 세워 보일 뿐 일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승은 그 모습을 늘 옆에서 지켜봤다. 하루는 구지선사가 출타 중인데 어떤 스님이 법을 물으러 왔다. 객승은 동자승에게 물었다.

“선사께서는 법이 무엇이라 생각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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