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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동물이 식물로 전이되어가는 불가해한 시간

강제윤 시인 - 곤리도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10.24 08:57
  • 수정 2015.11.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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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은 저마다 영화롭던 섬의 옛 시절을 회상하며 모처럼 들뜬다. 곤리도는 고니섬, 고내섬, 곤이도(昆伊島), 곤하도(昆何島) 등 당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곤리도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섬의 모양이 하늘을 날아가는 고니(白鳥)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고 섬에 겨울 철새인 고니가 많이 찾아들곤 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진위야 어떻든 섬이 고니와 연관이 깊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웃 섬 학림도 또한 학이 많이 날아들어서 학림도라 했다는 것을 보면 이 근방 섬들이 한때는 철새들의 서식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까닭에 두섬을 같은 새섬이라 해서 곤리도는 윗섬, 학림도는 아랫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곤리도에는 할머니 혼자 사는 독거 가구가 대부분이다. 부부간에 사는 집은 드물다. 할머니들 다 돌아가시고 나면 다 빈집이, 빈 섬이 될 터이다. 젊은 축으로 보이는 노인 한 분이 말씀 하신다.
“나가 지금 환갑 진갑 다 지났는데 요 섬에서는 젤로 어립니다.”
예전에는 곤리도 앞바다가 황금어장이었다. 온통 물고기 밭이었다. '채낚기'로 물고기를 잡았다. '새우조망'을 처음 시작한 곳도 곤리도였다. 새우 조망은 그물 입구에 붙인 파이프가 모래바닥이나 진흙바닥을 탁탁 칠 때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새우를 잡는 어법이다. 어업이 융성할 때는 180가구까지 산적도 있다. 국민 학생만 180명이었다. 이 작은 섬에 물경 1000명 가까운 사람이 복작거렸었다. 논도 많았었지만 이제는 다 묵혀져 풀밭이 되었다.

어로활동이 활발하고 미역 같은 해초도 많이 났으니 ‘돈 섬’이란 이름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다니다 보면 통영 지방 섬들치고 돈 섬이 아니었던 섬이 없다. 어느 섬엘 가나 돈 섬이었다고 한다. 한 시절 섬들이 바다 것들로 넘치게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물고기의 씨를 마르게 하고 해초를 자라지 못하게 한 것은 사람들이다. 어업 기술의 발달이 오히려 재앙이 되었다. 대량으로 잡아들이고 마구잡이로 채취한 까닭에 바다 밭은 황폐화 되었다. 이제 바다가 거저 주는 것은 드물다. 물고기고 해초고 기르는 노고를 더해야 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양식을 할 기력도 없어 그저 양지녘에 나와 볕이나 쬘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도 식물이 되어간다. 나무나 풀들처럼 태양으로부터 직접 에너지를 얻으려는 듯 자주 볕에 나와 광합성을 한다. 동물이 식물로 전이되어 가는 불가해의 시간. 섬의 양지녘은 풀 수 없는 생명의 암호를 간직한 비밀의 정원이다.


철마가 곤리도로 간 까닭은?
곤리도 당산 정상에는 독집이 있다. 곤리도의 당집이다. 이 당집은 철마신앙과 관련이 깊다. 곤리도 당산에는 철마가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 곤리도와 마주보고 있는 미륵도 삼덕리 원항마을 당산인 장군봉 신당에는 마을의 수호신 철마가 모셔져 있었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철마가 사라져버렸다. 철마가 사라진 이유에도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철마를 탐내던 이들이 철마를 훔쳐서 배에 싣고 가다 곤리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수장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곤리도 사람들이 철마를 훔쳐갔다는 것이다. 어느 밤 곤리도 마을 청년들이 장군봉의 철마를 훔쳐 곤리도 당산에 묻어서 숨겨버렸다는 것이다. 어째서 곤리도 청년들은 원항마을 장군봉의 철마를 훔쳤던 것일까.

옛날 곤리도는 늘 식량이 부족해 살기 어려웠다. 주민들도 단명 하는 경우가 많았다. 뛰어난 인재가 태어나도 아주 일찍 죽곤 했다. 어느 해 곤리도 주민 한 사람이 삼덕항에서 어떤 도인을 만났다. 도인은 곤리도가 가난하고 인재가 나지 않는 것은 장군봉 산세와 정기가 곤리도를 누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비방을 알려줬다. 장군봉 당집에 모셔다 있는 철마를 훔쳐다 곤리도 당산에 독집(당집)을 짓고 당신으로 모시고 제를 올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액운이 사라지고 섬이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주민이 청년들을 모아 거사를 감행했던 것이다. 철마를 모시고 당제를 지내면서 곤리도는 마을이 번창하고 인재도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지만 실제로 철마신앙의 역사는 유구하고 광범위 하다. 철마신앙이 곤리도에 들어오게 된 이야기가 신화적으로 포장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철마신앙은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 전국적으로 유포된 민간 신앙이었다. 지역에 따라 쇠물, 쇠말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철마는 5-10cm 크기의 쇠로 만들어진 모형 말이다. 철마는 마을 당제에서 주신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마을신이 타고 다니는 동물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더러 마을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기도 한다. 간혹 토마(土馬)와 돌로 만든 석마(石馬)로 나타나기도 한다.

신들의 숲, 김해김씨 선산
마을의 서쪽 폐교를 지나 언덕을 넘어간다. 옛날에 고래가 떠밀려 왔다는 고래개 부근 바다는 이제 수상가옥들로 꽉 들어차 있다. 어류 양식장이다. 언덕은 초지다. 한때는 다랭이 논과 밭들이었지만 지금은 묵혀져 초원을 이루었다. 10여분 걸었을까. 잘 보존된 상록수 군락이 나타난다. 마을의 노인들이 “대한민국에 그런 숲 없다”고 자랑하시던 잣밤나무 숲이다. 숲은 잣밤나무 뿐만 아니라 생달나무, 동백나무 고목들로 가득하다. 생달나무 곁을 지나니 나무 냄새가 향그롭다. 생달나무 잎은 향이 좋아 방향제로도 쓰인다. 숲 주변 역시 온통 초원이다. 고라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꿩들도 먹이를 찾아 풀밭을 종종거린다. 논밭이 묵혀지면서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됐다.

인간의 간섭이 미치지 않으면 자연은 놀랍도록 빠른 회복력으로 야생의 생태계를 복원한다. 이 숲과 초원이 마침내는 곤리도의 가장 큰 자원이 될 것이란 예감이 밀려든다. 이 부근에는 묘지들이 유난히 많다. 마을의 공동묘지였던 셈이다. 상록수 숲은 김해 김씨의 선산 숲이다. 어느 왕릉 못지않게 잘 가꾸어진 숲. 거목들이 수호 신장처럼 묘지들을 보호하고 서있다. 신들의 숲이다. 새벽에 눈뜨자 문득 곤리도로 가고 싶었다. 이 숲이 불렀던 것일까. 이토록 잘 보존 된 잣밤 나무, 생달 나무 숲은 남해안의 섬들에서도 드물다. 보호림으로 지정해 보호해야 마땅하지 싶다. 온통 소나무들이 점령해버린 곤리도의 산에서 유일하게 남은 상록수 숲. 이 숲이야말로 곤리도의 진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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