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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상사, 사랑도 병인 것을

강제윤 시인 - 통영 학림도 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11.21 09:38
  • 수정 2015.11.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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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도는 도미와 우럭 같은 어류 양식장이 많지만 옛날에는 섬 주변이 온통 황금어장이었다. 지금은 물고기의 씨가 말랐다. 깔치(갈치), 조기, 삼치, 멸치가 지천이었다. 학림도 앞바다는 평균 14미터 정도로 수심이 깊고 조류 유통이 잘 된다. 그러니 해마다 통영 바다를 덮치는 적조에도 피해가 적은 편이다. 그 바다 덕에 옛날에는 물고기가 득시글거렸었다. 지금은 큰 배들이 멀리 동중국해까지 내려가 싹쓸이 해버리니 이 바다까지 살아서 오는 놈들이 없다.

옛날 학림도 사람들은 통영 전통 어선인 통구미배로 조업을 했었다.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아도 만선이었으니 작은 어선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심지어 삼치 같은 큰 물고기에 쫓긴 멸치들은 뭍으로 튀어오를 정도였다. 정어리만큼이나 큰 멸치들을 그저 바구니에 주어 담기만 하면 됐다. 그야말로 바다의 황금시대였다.

학림도에도 산책하기 좋은 길이 있다. 길은 여객선 뱃머리 선창가에서 시작된다. 보건진료소와 학교, 마을 앞을 지나면 작은 시미기 부근 동산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짧은 길이지만 숲 터널은 청량하고 그윽하다. 공원 아래는 당랑끝이다. 천연 방파제처럼 생긴 지형이 풍랑을 막아주는 모퉁이 끝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여기서 해신제를 지냈다 하니 신성한 땅이다. 작은 시미기 앞 모래벌은 바지락 체험장이다. 마을의 공동 바지락 양식장 중 일부를 외지인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인근의 섬들 중 학림도에서 가장 많은 바지락이 나기에 가능한 일이다. 해안 도로를 따라 20여분을 더 걸으면 큰 시미기다. 큰 시미기 해변의 바지락 양식장은 마을 사람들만 캘 수 있다. 마을 사람이라고 아무 때나 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촌계에서 “영을 내려야”만 캘 수 있다. 전라도 섬이나 해안 지방에서는 공동 양식장의 채취를 허가하는 것을 “개를 튼다”고 하는데 이 지방에서는 “영을 내린다”고 한다.

왜 하필 양식장의 바지락 채취허가가 나는 것을 영 내린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부근 섬들이 삼도수군통제영의 통제를 받았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연대도가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렬사의 사패지였듯이 이 섬사람들도 통제영의 부역에 동원되곤 했을 것이다. 또한 장정들은 누구나 어민인 동시에 수자리를 살던 군인이기도 했었다.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다가 때가 되면 징집을 당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통제영의 명령을 받고 일하던 때의 기억이 전승되어 언어에 남은 것이리라.


바지락 양식장은 봄, 가을 몇 차례 영이 내린다. 영이 내린 날이면 주민들은 자신의 능력껏 바지락을 캐다 팔수 있다. 보통 한사람이 40-50kg 정도를 캐지만 솜씨 좋고 부지런한 사람은 100kg까지 캐내기도 한다. 학림도 지명유래집이나 주민들에 따르면 시미기란 지명은 마을에서 십리길이라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하지만 큰 시미기까지 실제 거리는 2키로 남짓에 불과하다. 왕복 십리라면 맞겠다. 큰 시미기 서쪽 해안은 깎아지른 기둥같은 바위들이 장관을 연출한다. 주상절리다. 섬사람들은 기둥바위 산이라 부른다.

통제영 시절 학림도는 미륵도 영운리에 있던 삼천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삼천진 관아에서 이곳 기둥바위산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기둥바위산 주상절리가 신령한 기운은 뿜어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일대는 명당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곳에 묘를 쓰면 학림마을에 큰 복이 온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지역에는 극심한 가뭄이 든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실제로 심한 가뭄이 들자 이곳의 묘를 파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추도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다.

추도 미조 마을 앞 용머리 섬에도 천하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마을이 가물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아무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해 마을의 모든 샘의 물이 다 말라 버렸다. 도인을 모셔다 원인을 알아보니 누군가 용머리 섬 명당에 묘를 썼던 모양이다. 묘를 이장 시키자마자 비가 쏟아졌다고 전한다. 그 이후 용머리 섬은 나무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섬이 됐음은 물론이다. 섬사람들에게는 물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설들이다. 명당자리 보다 더 소중한 게 물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 어찌 죽은 이의 묘 자리에 비할 것인가.

이 땅 어딘들 없겠는가마는 이 섬에도 어김없이 비극적인 사랑의 전설이 내려온다. 큰 고래개와 검금굴 사이에는 상사바위란 이름의 바위가 있다. 옛날 이 섬의 어떤 총각이 처녀를 짝사랑 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다. 총각의 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뱀으로 변신해서 처녀에게 올라붙었다.

총각 귀신이 붙은 처녀는 온갖 처방을 다 해봐도 떨어지지 않자 저 바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그렇게 총각도 죽고 처녀도 죽었다. 일방적이고 지나친 집착은 자신도 죽고 상대도 죽인다.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 이를 수 있을까. 저 바위를 사랑바위라 하지 않고 상사바위라 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상사는 사랑이 아니라 병인 것이다. 아, 그러나 상사만이랴. 때론 사랑도 병인 것을. 그것도 불치의 병인 것을. 환자가 낫기를 원치 않으니 결코 나을 수 없는 불치병.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도 나처럼 그대의 병이 치유되지 않기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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