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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도깨비도 흉내 못내는 뱃사람들

강제윤 시인 - 통영 노대도 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12.05 09:02
  • 수정 2015.11.1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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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도 사람들도 욕지도처럼 어류양식을 많이 한다. 주로 조피볼락(우럭)이나 돔, 농어, 감성돔 등을 기른다. 상리 마을도 주민 60%가 양식으로 살아간다. 상노대 상리와 하노대 사이 바다는 섬에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하다. 양식을 하기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여기도 수상가옥에 살면서 양식장을 돌보는 이들은 대부분이 동남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초창기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해상 가두리 양식을 하는데 기르기 어려운 어종 중 하나는 도미다. 도미는 그물을 물어뜯는 습성이 있다. 특히 여름, 가을 먹이 활동이 활발한 철에 그물을 많이 뜯는다. 그물이 뜯긴 것을 일찍 발견하지 못하면 가두리 그물을 뜯고 탈출해 버린다. 먹이가 제때에 공급이 안 되면 그 정도가 더 극심하다. 그러니 한시도 양식장을 비울 수가 없다. 그럴 경우 몇 천, 몇 억씩 손실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 양식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물을 감시하기 위해 다이빙을 한다. 전문 다이버를 고용하면 하루에 25만 원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양식장 주인들은 다이빙을 배워 수시로 물속의 그물 상태를 감시한다. 그때 실비로 다이빙을 못하는 이웃들의 양식장 그물을 대신 봐주기도 한다.

어촌계장님은 지금 어류 양식업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수요에 비해 공급 과잉이란다. 거기다 중국이나 일본산 어류까지 무차별적으로 수입되니 양식업자들은 적자를 보면서도 물고기를 출하할 수밖에 없다.

"국산 양식 물고기도 과잉 생산인데 거기다 수입까지 되니 중간상인들 농간에 놀아날 수밖에 없지요. 생산자가 튕겨야 하는데 서로 우리 고기 사달라고 사정하는 형편이니 원."

어촌계장님은 6대째 노대도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고도 뱃일을 다녔으니
“엄마 뱃속에서 뱃일을 배운 셈”이다. 정식으로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스물한 살 때부터다. 그는 어민들이 섬에 태어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어촌계장님 주선으로 '쌔내기(선외기)'를 타고 하노대 민박집으로 건너왔다. 섬을 건너는데 불과 3분 남짓, 마주 본 두 섬은 서로 손짓 하면 보일정도로 가깝다. 하노대 민박집에 들었다. 주인도 어류 양식을 한다. 우럭이나 돔들을 키운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처럼 어려운 적은 없었다. 양식업자 10명중 3~4명만 겨우 살아남을 정도로 다들 파산 직전이다. 중간상들은 "가격이 좀 올라갈 것 같으면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서 유통해 버린다." 농업이나 어업을 막론하고 중간 유통 상인들의 농간이 가장 큰 문제다.

하노대는 상노대보다 작은 섬이지만 일찍부터 어업의 중심지였다. 일제 때는 일본 어업자들이 들어와 살았다. 상노대는 멸치와 장어잡이의 전진기지였다. 멸치는 국내에서 소비됐지만 장어는 일본으로 수출했다. 하노대에 큰 무역 회사까지 있었다. 청노관이란 부르는 기생집도 여러 곳이 있었다. 청노란 청루(靑樓)를 말하는 것일 터다. 인근 섬의 배들도 장어잡이를 하러 노대도 바다로 몰려와 장어를 잡았다. 외지 배들도 노대도의 무역회사에 장어를 팔았다.

노대도의 멸치잡이는 들망어업이었다. "불 켜서 멸치를 꼬여내 잡는 어법"이 들망이었다. 들망어업은 6채의 배가 한조가 되서 조업을 했다. 기관 배 한척과 노를 젓는 전마선 5척. 두 척은 멸치 삶는 배, 두 척은 그물잡이 배, 한 척은 불배다. 저물녘이면 "통통배가 배를 차고 나가서" 어둠이 깔리면 그물을 펼치고 조업을 시작한다. 실제 조업은 4척으로 이루어진다.

멸치 삶는 배를 세로로 세워두고 그물잡이 배 두 척이 그물을 펼치고 대기한다. 이때 불배 한척이 횃불을 켜서 멸치떼를 그물로 유인한다. 불을 켜면 플랑크톤들이 몰려들고 그 플랑크톤을 먹기 위해 멸치떼가 뒤쫓는 것이다. 멸치떼가 그물 안으로 몰려들면 그물을 들어 올려 포획한다. 그래서 들망어업이다. 기관배는 노 젓는 배를 어장과 섬 사이까지 이동 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멸치 삶는 배 두 척은 교대로 어장과 포구를 오갔다.

노대도의 들망어업은 20여 년 전에 끝이 났다. 대형 건어망 선단이 길목을 지키며 멸치를 싹쓸이 하니 소형어선인 들망으로 잡을 것이 없어졌다. 멸치떼가 몰려들 때 노대도는 부자 섬이었다. 어미섬인 욕지도보다 들망어업이 먼저 시작됐고 더 발전했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시절의 영화다. 멸치떼가 떠나간 섬은 쓸쓸하고 고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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