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획취재> “여가 돈 섬이었는디, 돈 섬”

강제윤 시인 - 고흥 득량도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12.19 09:45
  • 수정 2015.11.10 22:43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동력이 없으니 그 좋은 논들도 다 묵혀두고 있다. 겨울에는 북풍이 많이 불고 수온이 차서 어류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바다가 겹 섬이 됐으면 좋을 걸, 홑섬이 되니까 바람이 들이처분께 암 것도 못해요. 바다 양식도 못하고 하우스도 못하고. 전부 맨 늙은이들뿐이라 추우면 회관서 점심해 묵고 노는 게 일이요. 딴 데는 돈 버느라 정신없는데. 편한 섬이요."

이장님은 편안하게 사는 섬이라고 넋두리처럼 말씀하지만 나그네가 보기에 섬에 이리거리가 적은 것이 오히려 노인들에게는 복이지 싶다. 추운 겨울에 고생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밥 굶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이 어찌 행복이 아니겠는가. 한겨울 칼바람 속에서 고생해가며 몇푼 더 벌어도 그 돈이 노인들을 위해 쓰이지 못하는 것을 나그네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 일하다 병들면 병원비 약값으로 나가고 조금 모이면 자식들에게 내주기 바쁘다. 하지만 이 섬 노인들은 돈벌이가 적으니 더 여유롭다. 평생 희생하고 고생했으니 노년의 겨울이나마 일하지 않고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고대구리배로 고기를 잡으면서 살던 젊은 사람들은 다들 녹동을 비롯한 외지로 나가 산다. 오랜 세월 모시던 당제도 2009년부터는 더 이상 지내지 않는다. 농악도 울리고 당산 숲에 올라가 직접 밥도 지어 바치고 했는데 이제는 노인들뿐이라 힘에 부처 중단한 것이다. 예전에는 묘지도 산에다 썼는데 이제는 상여 맬 사람이 없어서 다들 자기 전답에 묘를 쓴다. 섬이 노령화 되면서 풍습도 변하고 전통 문화도 사라져 간다. 땅이 좋아 양파나 마늘 같은 작물을 심으면 잘 되지만 노인들 힘으로는 운반도 힘들어서 밭농사도 잘 짓지 않는다. 난시청 지역이라 텔레비전도 잘 나오지 않는다.

"난시청이나 나라에서 해소해 주면 좋겠는데 안 해주네요."

그래도 이장님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여기 사람들은 못배웠어도 자식들은 다들 대학 나왔어요. 도양읍장이랑 번영회장도 득량 사람이고. 도양읍내 감투는 득량에서 다 썼다해요."

섬사람들은 섬에 풍력 발전소가 들어 올 거라는 소문에 기대가 크다. 하지만 풍력 발전소가 들어서 선다고 젊은 사람들이 돌아올까.

득량도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다. 관청마을 고갯길을 넘으면 선창마을이다. 배가 드나드는 선창이 먼저 생겼던 마을이라 얻은 이름 선창마을. 16가구가 있지만 4집은 서울에 근거지를 두고 사는 고향 사람들이다. 관청마을 보다 작지만 선창마을은 숲이 좋다.

"당나무 밑이 시원해서 여름에는 점심 먹으러 오기도 싫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피서를 오는 사람들이 많다. 고향을 떠나 사는 자녀들이나 외지인들까지 찾아들어 여름동안은 "몸살이 날 정도다." 어느 집 마당, 할머니는 동부 콩이랑 팥을 까서 말리는 중이다. 아직도 군불을 때는 행랑채 부엌에는 호미가 잔뜩 걸려 있다. 세어보니 22개나 된다. 올해만 4개를 더 사셨다 한다. 할머니는 호미 수집광이실까. 저 호미들로 밭도 매고 갯벌에 나가 개불이나 바지락도 파신다. 오랜 세월 사용하고 닳을 대로 닳아버린 호미들까지 버리지 않고 모아오신 거다. 할머니의 고단한 노동의 역사가 호미처럼 걸려 있다.


마당에는 밀감나무 몇 그루가 아직 열매를 달고 있다. 이미 몇 상자는 따서 자식들에게 보내주셨다. 할머니가 따 주시는 밀감이 새콤하면서도 달다. 하우스 밀감에 비해 그 맛이 깊고 진하다. 그런데 밀감에 굵은 씨가 있다. 제주 밀감에는 좀 채로 씨가 없는데, 고흥이나 완도 지방의 밀감에는 간혹 씨앗이 들어 있다. 왜 그럴까,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오늘 할머니가 그 답을 주신다.

"유자나무 가까이 있는 귤나무는 씨가 생겨요. 수정할 때 벌들이 귤이랑 유자나무를 왔다갔다하다가 그런 거 같아요."

물론 추측이다. 그래도 선창마을에는 다섯척 어선이 남아있다. 낙지 통발이나 새우 조망을 하고 장어도 잡는다.

"여기 득량 고기가 알아줘요."

할머니도 젊어서는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다녔다. 고대구리 배를 했었다. 고대구리가 불법어업이 되면서 7년 전 뱃일은 접었다. 설 쇠고 3월까지는 개불을 파서 돈벌이를 한다. 갯벌에서는 또 꼬막이나 키조개, 피꼬막 등을 판다. 전에는 새조개도 많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말소리 때문이었을까. 낮잠을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오신다. 일흔 다섯 할아버지가 이 마을 이장님이다. 오랜 세월 두 분이 함께 뱃일을 하셨었다.

"고흥만, 호산께 그런데서 멸치랑 장어랑 겁나게 잡았었는데. 고흥만 막고 나서 고기가 귀해요. 푹들어간 홀, 거길 막아버리께."

득량만에 고기가 귀해진 것은 고흥만 간척지 때문이다. 정부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고흥군 도덕면과 두언면 사이 바닷길 2875m를 방조제로 막아버렸다. 그 때문에 갯벌 31제곱 킬로미터가 사라져 버렸다. 과거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득량만을 지나 고흥만 갯벌을 찾아가 산란을 했었고 그 덕에 고흥만이나 득량만 바다에는 고기가 바글 거렸었다. 하지만 간척 사업으로 갯벌이 사라지자 물고기들의 산란장도 없어졌다. 산란장이 사라지니 이 바다에 물고기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된 것이다.

"금바다였는디. 옛날에는 한배씩 잡았었어요. 그걸 농토로 만들어 버렸으니. 지금은 어디 농사가 시세가 있나. 물이 유통이 안 되니 바다도 죽어버리고."

고흥만 간척으로 물고기 산란장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방조제에 막혀 해수 유통이 안돼 득량만 갯벌도 썩어간다는 것이다. 갯벌을 막아 바다를 죽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끊어놓고도 정부는 책임지지 않는다. 여기뿐이랴 새만금이 그렇고 전국의 수만은 간척지가 그렇다. 보상도 간척지 주변 주민들만 조금 받았을 뿐이다.

"호산께 사람들만 쪼깐 보상 받았제. 우린 보상도 못 받고. 이런데 사람들만 죽었제. 섬, 바다를 보고 산디. 옛날에는 여가 돈섬이었는디, 돈 섬."

이 마을에도 돌담대신 담들은 대부분 벽돌담이다. 40년 전 새마을운동 시작할 때 돌담을 헐고 쌓은 것이다. 돌담은 수 백년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튼튼한데 저 블록 벽돌은 벌써 썩어서 시커멓다. 이 작은 섬의 전통을 뭉개버리고 시멘트로 획일화 시켜버린 새마을 운동이란 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날림이었는지 오늘 새삼 확인한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