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획취재>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

강제윤 시인 - 통영 한산도 기행(1)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3.12.26 08:45
  • 수정 2015.11.10 22:43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순신은 도망치다 잡혀온 수군들을 처형한다. 군율을 엄하게 하는 것은 병사들을 전장에 붙들어두기 위한 고육책이다. 병사들을 전장에 머물게 하는 것은 애국심이 아니다. 공포다. 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난중일기에 적의 수급을 베어낸 기록만큼이나 탈영병의 목을 베었다는 언급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장의 안과 밖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무능하고 물정 모르는 임금은 그저 '급히 적들의 돌아갈 길목으로 나가서 물길을 끊고 도망치는 적을 몰살하라.' '부산으로 가서 돌아가는 적들을 무찌르라.'는 뜬구름 같은 교서만 내릴 뿐 군사나 무기를 보내주지 않는다. 제 한 목숨 보전에도 급급한 왕에게 전장에 보낼 지원군이나 무기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전쟁 시작 20일도 못 되어 도성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도주한 무능한 조정. 전쟁의 와중에서도 부패한 관리들의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명나라 고관 송응창이 보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하려 하고' 남해 부사 기효근은 '배 안에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고 이순신은 탄식한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여인을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사람됨은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하고 한심스런 지경이다.'

이순신 혼자서 아무리 군율을 엄하게 한들 이탈해 가는 민심을 막을 도리가 없다.

'옥과의 향소에서 지난해부터 수군을 잡아서 보내는 일을 성실히 하지 않아서 도피자의 수가 거의 100여명이다.'

징집된 백성이 무능한 나라의 군대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살기 위함이다. 죽음을 무릅쓴 탈주. 죽음의 공포보다 강한 것이 생에 대한 애착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임금과 관리들은 제 살길을 찾아가 버리고 백성들만 사지(死地) 내모는 나라. 백성들이 그런 나라에 목숨을 내놓지 않으려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전쟁 중에는 탈영병만이 아니라 포로가 되어 왜군에게 협조한 백성들도 많았다. 백성이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나라가 백성의 보호자가 아니라 수탈자였으니 그런 것이다. 나라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고마운 대상이 아니었으니 그런 것이다. 나라는 왕과 양반들의 나라였지 미천한 백성들의 나라는 아니었다.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나라나 왜적이나 다 같은 약탈자였다.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해 왜적과 맞서 싸운 것 또한 왕조와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왜적의 만행이 너무도 가혹해서였다. 나라는, 임금은, 조정은, 양반 지배세력은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결코 그런 백성의 뜻을 알지 못했다. 전란 뒤 백성들은 더 이상 임금과 조정과, 양반들을 두려워하지도 신뢰하지도 않게 됐다. 그러므로 후일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과 조정이 남한산성에 갇히게 됐을 때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수수방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592년(선조 25년) 7월 7일, 전라우수사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와 합류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군의 배 70여척을 격파하고 불태우는 대승을 거둔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1593년 수군의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생각이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덧 닭이 울었다.'(1593.7.15)

'원 수사의 음흉하고 간흉함이 대단했다.'(1593.7.28)
1592년 4월 시작된 왜군의 침략으로 조선 반도는 7년간 고통이 극에 달한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1592년(선조 25년) 1월 1일부터 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기록이다. 마지막 일기를 쓴 이틀 후에 이순신은 절명한다.

옥포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한산도해전까지 해전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이순신이었지만 육상의 패전 소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593년 6월 29일 10만의 왜군이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른바 2차 진주성 싸움. 1592년 10월의 1차 진주성 싸움 때는 3800여 조선군과 성민들이 왜군 3만과 싸워서 승리했다. 하지만 2차 진주성 싸움의 결과는 참혹했다. 성이 무너지자 왜군들은 성안에 남아 있던 6만여 명의 조선 백성들을 창고에 몰아넣고 모조리 불태워 죽였다.

전쟁이란 그토록 무참한 것이다. 평화의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모두가 시대의 행운아들이다. 그 행운의 고마움을 모르고 전쟁을 마치 아이들 공놀이나 되는 양 떠드는 자들이 이 나라에는 아직도 많다. 악마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악마다.

임진왜란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고, 불태워져 죽고, 굶어 죽고, 죽고, 죽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한'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사람은 없다. 전쟁은 사람이 아니라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 전쟁에는 이쪽 사람도 저쪽 사람도 없다. 오로지 적군과 아군만 실재한다. 적을 이롭게 하면 아군도 적이 된다.

'훈도를 처형했다.'
'도망병을 처형했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