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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머리는 가려웠고 심사는 외로웠다’

강제윤 시인 - 통영 한산도 기행(2)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4.01.09 09:48
  • 수정 2015.11.10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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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하고 또 처형해도 처형당할 자들은 넘쳤다. 전쟁터에 사람이 설자리는 없다. 대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란 무엇인가. 이순신 또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적과 탈영병을 가차 없이 처형하고서는 어머니와 자식들 걱정에 날을 새고 또 병사들의 고통에 눈물 흘렸다. 전장은 죽음과 삶의 경계였다.

'미역 60동을 따왔다. 군관 정사립이 왜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1594.3.23)
'송한령이 대구 10마리를 잡아 왔다.'(1594.11.5)
'견내량의 군사 방어선을 넘어서 고기잡이를 한 어부 24명을 잡아다 곤장을 때렸다.'(1594.11.12)
'이날 청어 40두릅을 곡식과 바꾸어 사려고 이종호가 받아 갔다.'(1595.11.21)

바다는 죽음의 바다이면서 삶의 바다이기도 했다. 둥둥 떠다니는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물고기와 조개의 먹이가 되는 바다. 그 바다에서 병사들은 동료들의 살을 먹고 자란 조개와 전복을 따고 물고기를 잡아다 굽고 국을 끓였다.

이순신은 불안한 자신의 앞날과 어지러운 심사를 점술에 기대기도 했다.
'장님 임춘경이 와서 내 운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1597.5.11)
'선홍수가 와서 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水雷) 둔(屯)인데 천풍(天風) 구(女后)로 변했으니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고 했다.'(1597.5.12)

감지 못한 머리는 늘 가려웠다.
'다락에 기대어 저녁나절을 보냈는데 심회가 언짢았다.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1596.3.25)
'닭이 운 뒤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불러 긁게 했다.'(1594.8.5)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부하 군관들에 대한 증오를 자주 토로하기도 하고 첩의 부정을 꿈에 보기도 했다. 이순신에게는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도 해주 오씨와 부안댁 두 사람의 첩이 더 있었다.


이순신은 '초 1일 한 밤 중에 꿈을 꾸었는데, 나의 첩(부안 사람)이 아들을 낳았다. 달수로 따져 보니 낳을 달이 아니었다. 꿈이지만 내쫓아 버렸다.' 현실의 불안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순신 또한 사랑을 잃을까 노심초사 하고 질투심에 몸을 떠는 외로운 사내였다. '나라가 위급함에 처해 있는데 남해 부사 기효근이 어린 색시를 싣고 다니며 논다'고 분노하던 이순신 또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시고 시를 읊고 수시로 여인들을 품었다.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으며 밤을 지새웠다.'(1595.8.15)
'이날 달빛은 대낮 같고 바람 한 점 없는데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이 심란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신홍수를 불러 퉁소를 듣다가 밤 10시경에 잠들었다.'(1596.1.3)
'개(介)와 함께 잤다.'(1596.3.9)
'국화 떨기 속에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여진(女眞)과 잤다.'(1596.8.8)
'광주 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술에 취했다. 최철견의 딸 귀지(貴之)가 와서 잤다.'(1596.8.19)

이순신은 누구보다 원칙에 충실한 관리였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할 당시 자신의 상관인 병조정랑 서익의 인사 청탁을 거절했다가 후일 서익의 보복을 받았다. 고흥의 발포 만호로 재직 중 이순신은 서익의 모함으로 파면 당했다. 먼 친척이었던 율곡이 한번 찾아오라는 제의도 거절했다. 1691년 2월 서애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 좌수사로 부임 한 뒤에도 원칙에 따라 모든 일을 처결했다.

이순신이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운이나 기적이 아니라 원칙의 승리였다. 왜군의 침략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었으나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은 임무에 태만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시키고 총포 등 무기를 확충하고, 전함을 새로 만들거나 수리 하고 거북선을 건조했다. 이러한 일들은 전쟁을 앞둔 군 지휘관이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이순신은 해야 일들을 마땅히 했으나 다른 관리와 지휘관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쟁에서의 승패를 갈랐다. 평상이든 전장이든 기적은 없다. 준비가 기적을 만든다. 하지만 전란을 겪고서도 조정과 관리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송사가 진행 중인데 술과 첩, 심지어 자신의 딸까지 상납해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관리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순신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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