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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이순신장군의 승리는 거북선이 아닌 판옥선의 힘

강제윤 시인 - 통영 한산도 기행(4)

  • 완도신문 webmaster@wandonews.com
  • 입력 2014.01.22 20:57
  • 수정 2015.11.1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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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다. 하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다시 포를 쏘는 데까지 중간 간격이 너무 길었다. 전함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서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와키자카는 조선수군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고 그래서 전함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한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닌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본래 육전에서 발전한 진법이었는데 이순신은 이를 해전에 응용했다.

학익진과 함께 조선 수군이 한산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원동력은 판옥선의 존재였다. 판옥선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이다. 한산해전 뿐만 아니라 옥포, 당포, 부산포해전 등에서 활약한 전함도 거북선 3척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선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적의 지휘선을 공격하고 적 함대의 전열을 흩뜨리는 기동 돌격대의 역할을 했고 실제 전투는 판옥선이 담당했다.

오랫동안 조선 전함은 평선(平船)인 맹선이었는데 왜선의 규모가 커지고 화력이 강해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명종 10년(1555년)에 새롭게 개발한 전함이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2층 구조의 높은 배였으니 왜구들이 쉽게 기어오를 수 없었다. 왜구들의 장기인 배에 올라 백병전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였던 것이다. 또 높은 구조의 판옥선에서는 아래를 향해 활을 쏘기 유리했고, 함포의 포좌 또한 높아 명중률도 높았다. 판옥선의 승선인원은 130명이나 됐으니 노를 젓는 노꾼의 수가 많아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기동성과 견고함을 동시에 갖춘 전함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판옥선은 앞 쪽 뿐만 아니라 옆과 뒤에도 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급회전이 가능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졌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몇 척의 몫을 해냈다. 이러한 판옥선에 날개에를 달아 준 것은 학익진이었다. 판옥선들이 학 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포위하고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조선수군 전함 55척은 손실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46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틀 뒤인 10일에는 창원 안골포에 있다 나온 왜선 42척과 마주 싸워 이 또한 섬멸시켜버렸다.


한산해전은 조선이 수세에 있던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고 왜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전투였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라 평가 하지만 실상 한산해전은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왜군의 전력은 막강했고 명나라 군대는 무능했다. 이순신 함대가 한산대첩에서 왜군을 격파하지 않았다면 파죽지세의 왜군은 그들의 호언대로 조선을 멸망시키고 명나라로 진격했을 것이다. 그 시절부터 이미 일본의 동아시아 식민지 지배가 시작됐을 개연성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왜군의 야망을 좌절시킨 한산해전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뒤바꾼 세계적사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산해전 이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대적인 함선 건조를 명하고 준비가 될 때까지는 조선 수군과 결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한산해전 뒤 조선 수군 100척이 부산포를 공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왜선 5천척 중 단 한척도 싸우러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 함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산해전이 갖는 해전사적 의미 중 하나는 이 전투에서 본격적인 함대 함 전법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한산해전 전까지는 해전이라 해도 그것은 육전의 연장에 불과 했다. 전함끼리 머리를 대면 배에 올라 1대1 전투를 했다. 그런 싸움에서 100년의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단병술과 칼싸움의 고수가 된 왜군에게 물고기 잡고 농사짓다 입대한 조선수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함대 함 전법을 통해 병사들끼리 직접 싸우지 않고 전함끼리만 싸우게 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 함 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중 한산해전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에서 최초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한산해전 전에도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다. 전면전을 통한 한산해전의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다.

이순신이 기습전 전술을 버리고 위험부담이 크고 아군의 사상자가 많이 날 수 있는 전면전을 택한 이유는 백성들 때문이었다 한다. 기습전을 하다 보니 왜군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도망가면서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래서 바다 한가운데로 왜군을 불러내 전면전으로 몰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불가피하게 기습전을 하는 경우에도 꼭 몇 척의 배는 남겨줬다. 도망갈 퇴로를 열어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의 피해가 적었다. 그 전투가 백성을 희생할 것 같으면 왕의 명령도 단호히 거부했다. 백성을 위한다는 그것이 왕의 미움을 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왕에게 백성은 왕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으니 백성을 왕조보다 우위에 두는 이순신의 애민 정신은 왕의 증오를 사고 불안을 부추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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