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약자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 박준영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5.08.20 13:12
  • 수정 2015.11.04 10:50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준영 변호사

군민여러분 안녕하세요. 노화도가 고향인 박준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노화도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습니다. 현재는 수원에서 개업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완도신문 1000호를 기념하는 지면으로 고향분들께 인사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아버지께서 2001년 굴삭기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3일 전 마지막 통화를 기억합니다. “공사현장에서의 일은 새벽잠을 1분이라도 더 청하고 싶을 만큼 고되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식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했다. 너희들은 잘 살 것이다.” 전 눈물의 기도를 먹고 자란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제겐 큰 행운이었습니다. 아니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내리는 징계는 종류별로 다 받았고, 사고뭉치였던 제가 노화종합고등학교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점 때문에 주변 분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격려의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학벌과 인맥이 없는 고졸합격자를 선뜻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습니다.

취업에 실패하거나 취업을 원하지 않을 때는 출신 대학교 주변이나 고향에 개업을 한다지만, 완도에 변호사 사무실을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고,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제게 맞는 개업지는 없었습니다. 2006년 2월, 낯선 타향과 다를 바 없는 수원에 둥지를 튼 것은, 제게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한동안은 돈을 벌기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수기에는 이런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돕고 살겠다.” 하지만, 이런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변에서 ‘영감’이라고 부르며 높여주는 데 금새 익숙해져버리고, 좋은 음식 먹으며 편히 지내는 삶에 젖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섬에서 고생하며 저를 키웠고, 그 고생의 결과로 얻은 행운임에도 저는 한동안 그걸 잊어 버렸습니다. 저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변화를 가져다 줄 사람과 사건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런 고민없이 편안함과 경제적 이익을 생각하며 세상을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운 좋게 노숙을 하던 가출 청소년, 장애인, 탈북자, 공권력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들의 사건을 변호했습니다.

이들을 만나고 이들의 사건을 접하면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부모님의 삶을 떠올렸습니다. 가난 속에서 고단한 삶의 끝을 작업현장에서 맞았던 아버지, 울음으로 세상을 견뎌야 했던 어머니, 불행하고 불우했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방황하며 우울해했던 제 청소년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제 부모와 제가 겪었던 삶의 관점에서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려 했고, 애정을 갖고자 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제 부모의 삶과 제 과거가 가져다 준 힘’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과 눈물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전 사회적 약자들을 변호하면서 의미 있는 성과도 거뒀고, 올 초에는 대한변협에서 주는 공익대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여유 있고, 편안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이런 삶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 겁니다.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살아오는 것’을 ‘의지’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선택할 수 없는 상황도 있고, 운명적인 사건이 어떤 상황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 부모 그리고 제가 만난 사람과 사건이 저의 삶을 이끌었고, 앞으로도 이끌어 갈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김중식의 시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나온 문장입니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 때론 눈물이 납니다. 힘 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약자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