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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두운귀(鳳頭雲歸) 영험한 삼두리 할미 할배당

김하용(향토문화연구가)

  • 김하용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5.09.02 20:30
  • 수정 2015.11.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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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용(향토문화연구가)

삼두리 동쪽 저수지 부근 마을과 북동쪽으로 이어진 산골짜기를 오르면 산등성이 너머에 분지마을이 있다. 이 마을까지를 합하여 삼장골 또는 삼장안(三將案)이라고 했다. 지금은 묵전만 남아 있을 뿐 인가는 없고 해운사로 통하는 길만 훤하다.

완도외면의 신정리로 통하는 남향 도로와 지금의 수목원을 지나 대신리로 통하는 북향 도로와 삼두리 두읍리로 통하는 서향 도로의 세 갈림길 마을을 삼장안(三長安)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부터 삼장리와 두읍리를 합쳐 삼두리가 됐다 삼장동은 청소년수련원이 들어서 있을 뿐 삼장안 마을은 야산으로 변모해 그 흔적마저 찾을 길 없다.

동제(洞祭)의 명칭은 당제라 하는데, 음력 정월 초이틀 새벽 2시경 당집에서 지낸다. 신격은 당 할배와․ 할미이다. 당집은 1983년에 새로 지었으며 그 이전에는 초가집으로 둘레에는 돌담이 있었다. 당숲 안의 나무는 베어 쓸 수 없으며 함부로 대할 때는 큰 변을 당하여 죽거나 반신불수가 된다고 하여 상여도 당 주위를 피해 갔다.

당제 20일 전쯤에 마을 어른들과 이장, 개발위원들이 부정 없고 깨끗한 사람 중에 생기복덕을 봐 유사 3명을 뽑았다. 제의 총 책임은 이장이 맡는다. 선출된 유사는 부정한 것을 삼가고 초상집 출입도 금하며 부부관계나 술 담배도 삼갔다. 제당과 유사의 집에는 황토 흙을 깔고 금줄을 치는데, 이 금줄은 새끼를 왼쪽으로 꼬며 하얀 한지를 꽂아 제주 집과 당 샘에 치고, 제주들은 날마다 당샘에서 목욕재계하고 제물도 당 샘물로 정갈하게 정성을 쏟았다. 물과 제기는 유사와 이장이 장에서 3일 전에 구입하는데 값을 깎지 않으며 제물과 제기는 유사 집에 보관한다. 제물 준비는 유사 집에서 여자들이 장만하며 집에서 내린 한주와 돼지머리, 명태, 나물, 탕, 전, 시루떡, 메, 국 등인데 고춧가루는 사용하지 않는다. 새벽 2시경 제를 올리기 위해 제물을 지게에 지고 유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농악패가 뒤를 따르되 출발하기 전 유사 집에서 농악을 한번 치고 제를 지낼 때는 농악은 치지 않고 밖에서 마음으로 정성을 드린다.

제의 순서는 헌작-재배-구축-재배-소지-헌진설식-음복(獻酌-再拜-口祝-再拜-燒紙-獻陳設食-飮福 ) 순이다. 구축 내용은 ‘정성껏 올린 음식을 잘 드시고 마을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이다. 헌식은 열십자로 짚을 깔고 제당 주위 사방에 음식을 놓는다. 제가 다 끝나면 음복을 한 뒤 당굿을 치면 대략 3시경이 된다. 아침에는 마을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한 유사 집에 모여 다 같이 음복한 다음, 마을 샘굿을 치고 용왕 신에게 고하는 선창 굿을 친 다음 가가호호 방문해 지신밟기를 한다. 1994년부터 오늘까지 상왕산 당 할배와 할미를 함께 모시고 있다.

영험한 삼두리 당샘 ‘봉두운기 약수’는 상왕봉 서북쪽 아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나는 형상을 하고 있는 봉두목 계곡 아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약수(당샘)가 있는데 지금부터 90여년 전 아랫마을 삼두리 사는 박 씨 부부가 결혼한지 8년이 되어도 자식이 없다가 약수터 아래 터를 잡고 매일같이 약수터를 청소하고 몸가짐을 바로 하고 정화수를 올리며 정성으로 공을 들이자 당 할미가 자식 5남매를 점지해 노부부는 약수(당샘)터 아래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이런 경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