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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 와서 무엇을 보려 하나요?"

김원자(보길도 비파원펜션 대표)

  • 김원자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5.09.17 01:24
  • 수정 2015.11.0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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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자(보길도 비파원펜션 대표)

어젯밤 펜션에서 묵고 간 손님을 청별항 버스정류장까지 모셔다주고 마트에 들러 몇 가지 생필품을 사들고 돌아왔다. 한 며칠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버린 마당 잡풀들의 엉클어진 모습이 새삼스레 눈을 거슬리게 한다.

아직은 늦더위가 남아 곧 땀이 날 이 낮 시간에 저걸 뽑아야 할까 잠시 생각해보다가 그만 두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지난 1년간 지겹도록 마당의 저 풀들과 씨름해왔다. 뽑았다 하면 또다시 어딘가에서 씨들이 날아와 제 세상인양 둥지를 트는 자연 속에서 풀들과 씨름을 한다는 건 거의 무모한 일이다. 시간이 많은 걸 해결해준다는 걸 한 해 동안의 경험으로 알았다.

어제가 백로, 밤에 기온이 내려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엉켜서 풀잎에 이슬이 맺혀 가을 기운이 완전히 나타난다는 날이다. 옛 중국 사람들은 백로로부터 2주 후 추분까지의 시기를 5일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그 특징을 말했는데,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 새들이 먹이를 저장한다고 하였다. 제비가 돌아가고 기러기 날아오는 이 시기엔 저 풀들도 겨울을 준비하러 그만 움츠러들겠지. 내가 구태여 낫 들고 호미질하지 않아도 위로만 치솟던 기운을 멈추겠지.

일할 생각을 버리고 나니 그냥 한가하다. 앞산의 푸름과 산자락에 걸친 구름도 눈에 들어오고, 매미며 잔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귀에 가득 들려온다. 햇볕이 이제 덥지 않게 느껴지는 마루에 앉아 1년 전 보길도에 들어오던 날을 떠올려본다. 9월 10일 추석연휴를 광주에서 보내고 들어왔으니 꼭 1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1년 전이 어제 일처럼 순식간에 지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10년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평생을 살아온 고향인 광주를 떠나 타지인, 그것도 외딴 섬에 들어와 적응해가는 복잡다단한 심정 때문이리라.

2014년 한국관광공사가 공모한 창조관광 프로젝트에 채택되어 “관광지 주변의 헌집을 활용한 새로운 문화공간창출”이라는 계획서를 가지고 보길도에 들어오던 날은 참 즐거웠다. ‘고산처럼 나도 보길도에 와서 말년을 행복하게 보내겠지’ 생각했다. 보길도에 대해서는 직전에 “보길도기행”이라는 책을 쓰면서 어느 정도 콘텐츠가 마련되어 있었고 게다가 한국관광공사 지원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 나오시마 섬의 이에 프로젝트(헌집문화공간 조성) 성공사례를 보아온지라 나름 잘 해낼 자신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사가 계획서대로만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원된 예산의 절반 이상을 말아먹은 헌집 정비와 보수는 현지의 비싼 인건비 때문에 표도 나지 않으면서 일감만 남겨놓고 있고 국내외 경제상황 때문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현지관광은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혼자의 힘으로 문화상품을 만들고 ‘스쳐가는 관광’을 ‘체류형 관광’으로 바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네이버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비파원 일기’란 페이지를 만들어 펜션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상을 소개하면서 이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다. “최고수준은 아니지만 하룻밤 조용히 묵어가기에 손색이 없는 시골풍경의 비파원”이 그나마 프로젝트의 명맥을 잇고 있고 보길도 보옥리 공룡알해변의 몽돌 모양을 본뜬 수제 천연비누 제조가 원래의 목적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펜션에 손님들이 오면 방을 안내하기에 앞서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지에 와서 무엇을 보려하나요?” 묻는다. 대부분 깊이 있는 여행일정을 못 잡고 오는 그들에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고 안내하는 것은 그래도 즐거운 일이다. 그들이 “덕분에 참 좋은 여행을 했다”고 인사하며 떠날 때는 보람을 느낀다. 이제 제법 보길도 주민이 되어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