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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문화유산 금일읍 신도청 할미당

김하용(향토문화연구가)

  • 김하용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5.10.14 23:55
  • 수정 2015.11.0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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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용(향토문화연구가)

17세기 말 평강 채씨가 전남 보성에서 고흥군 금산면으로 옮겨 살다가 산림이 수려하고 광활한 갯벌에서 해산물과 농사짓기에 알맞은 곳이라 여겨 정착했다. 당시 신평리(新坪里)에 큰 양곡창고가 있었고 구동에는 고을을 관리하는 도청(道廳)이 있었는데 양곡을 선적하기 불편해 신평 마을로 도청을 옮겨 마을 이름이 신도청이라 불었다. 일제강점기에 양곡을 강진으로 집결해 일본으로 모두 공출해 갔다 그 후 미질이 좋아 이곳을 간척했고 곡식이 많이 생산되는 큰 들이 있어 신평(新坪)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음력 정월에 동제를 올리는 신평당은 후포와 동송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 양쪽 울창한 숲속에 제당이 들어서 있다. 제각 앞으로 동서를 잇는 큰길 맞은편에 수령 350여년 되고 둘레 6.5미터 넘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버티고 있어 겨울에는 북풍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오가는 길손과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 상단 우측에 400살 넘은 팽나무는 완도군 보호수다.

약샘으로 유명한 망산 기슭에 평일정사가 자리잡고 전답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살려고 했으나 밤마다 망산 신령이 나타나 허락 없이 침범하였다고 격노한지라 마을 주민들과 의논 끝에 정성을 다해 당을 건립해 지금까지 할미당을 모시고 있다.

이 마을에 사는 김 씨가 정성을 다해 당제를 올렸는데 15년차 되는 해에 삼신할미가 아들을 점지해줘 대를 이어 잘 살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당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집으로 가져온 뒤부터 밤마다 하얀 소복을 입은 할미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어 나뭇가지를 당으로 도로 갖다 놓고 잘못을 빈 뒤 평상으로 돌아와 탈없이 잘 살고 있다.

또한 마을에서 덕망이 높고 인심 좋기로 소문난 이 씨도 당제를 올린 다음 꿈속에서 하얀 옷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나타나 딸 혼사를 앞두고 있는 김 씨 집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이상하게 생각해 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 씨 어르신이 평상시 덕망을 많이 쌓고 당 할머니에게 정성으로 제를 올린 공으로 딸 결혼을 좋은 곳으로 점지해 준 거라 말했다. 그 후 모든 일이 잘 풀려 가정이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당제는 매년 정월 초이튿날 자정에 지내는데 제주 선정은 음력 12월 말일 회의에서 가장 참신하고 덕망이 높은 세 사람을 선정한다. 선정된 제주는 그날부터 집안에 금줄을 치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며 당샘에서 목욕재계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했다. 제를 올리기 전날 당 주변과 당샘을 청소하고 제물은 좋은 것을 구입해 당샘에서 청결하게 준비한다. 제물로는 떡 한 시루, 나물류, 탕류 등을 많이 장만하고 밥 한 그릇과 마른 명태 세 마리와 대구 세 마리를 꼭 제물로 올렸다. 헌식할 때는 여러 탕과 나물 등 밥 한 그릇과 과일 그리고 한주(집에서 내린 술)을 올렸다.

할미당은 100여년 전까지는 마을 아래 사장등에 기와집으로 잘 지어졌으나 너무 오래돼 1940년에 1차 보수하고, 2차는 마을 주민들 선금과 군 지원금으로 2000년 5월 20일에 새롭게 시멘트 기와집으로 단장해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쉼터로 사랑 받고 있다. 사람들은 당으로부터 정신적 위안을 얻고 화합을 만들어가는 신성한 요람으로서 미신이 아닌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잘 보존하고 더욱 가까워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