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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이 보길도에 자리잡은 이유

김원자(여행칼럼니스트, 보길도 비파원 원장)

  • 김원자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5.10.29 15:05
  • 수정 2015.11.0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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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자(여행칼럼니스트, 보길도 비파원 원장)

뜰안의 나무들이 아직은 무성한 이파리를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겨울을 말하기엔 이르지만 곧 저 나무들도 잎을 떨궈내고 월동채비에 들어가겠지. 자연이 내일을 준비하듯 사람들도 자연을 이겨낼 준비를 한다.

육지보다는 따뜻한 남쪽 섬이지만 지난 겨울 준비 없이 맞닥뜨렸다 고생했던 생각을 하며 어제 오늘 이틀에 걸쳐 ‘뽁뽁이작업’을 했다. 펜션 유리 창문뿐 아니라 거처하는 안집 창호지까지 붙이자니 하루로는 모자라 꼬박 이틀이 걸렸다. 됐다. 이 정도면 2~3도 온도상승효과가 있다고 했으니 저 위쪽 서울은 물론 광주나 해남보다도 5, 6도는 춥지 않게 겨울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생활이 대부분인 도시에서야 겨울추위 따위가 무슨 문제일까마는 농촌이나 섬 지역에서는 자연이 주는 변화가 새롭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연은 때로는 위협적이고 여름 한철 벌레떼들의 습격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벌레 사라지고 햇살이 좋아 마냥 행복했던 가을은 잠깐이고 곧 겨울이 온다. 그래도 남쪽 섬은 혜택을 받은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생선과 따뜻한 기후, 그 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보길도 부황리는 섬이지만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는 안온한 산속 마을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설에는 “고산이 제주도로 가려다가 파도 때문에 잠시 머무르려고 했는데 풍광이 좋아 터를 잡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의 풍수지리안목으로 일찍이 점찍었던 곳이었을 것이다. 세연정 위쪽에 있는 옥소대에 올라보면 북쪽으로 해남 땅끝 전망대가 보인다. 해남이 종가인 고산에게 보길도는 그냥 우연히 발견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산의 보길도 생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점 중의 하나가 ‘보길도에 유배를 왔다’고 하는 것이다. 고산은 그의 생애 많은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냈지만 보길도에 유배 온 것은 아니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도로 임금(인조)을 보필하러 떠났으나 이미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다시 왕이 피신해 있던 남한산성을 향해 가는데 도중에 왕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그 때 “세상을 등질 결심을 했다”고 한다.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가려다 멈춘 곳이 보길도다. 제주도가 목적지였을지는 모르지만 도중에 보길도에 머물러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했었다. 어떤 경우에 이르면 사람이 ‘사람 사는 세상’을 버리고 사람 아닌 것들에 마음을 붙이려 할까? 재력이 든든했던 고산이 세상을 등질 결심을 했다면 필시 세상살이의 고달픔보다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보길도에 와서 고산이 일군 문학적 업적과 대정원의 조경만을 감상하지만 그의 ‘이루지 못한 꿈과 좌절’에 공감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법이다.

한 시대를 살며 권력과 정치,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했던 한 남자가 시와 예술로 안식을 얻고자 했던 목적의식이 뚜렷한 문화의 원형, 그게 세연정이며 낙서재이며 동천석실이다. '동천'은 동녘 동(東)자가 아니고 마을 동(洞)자를 쓰는데 “신선이 사는 곳, 즉 하늘로 통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요즘 말로 ‘넬라 판타지아’의 세계다. 고산은 그의 초월적 세계관과 고전지식, 그리고 정신세계를 그가 만든 정원에서 펼쳐 보이려 했고 이것들의 총화가 보길도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지금 세상은 고산이 살던 시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마음 다친 이들이 많은 시대일지 모른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방면에서 내일이 불안하고 마음 다친 이들이 늘어간다. 힐링이란 단어가 도처에 넘치고 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저 초월적 기류가 넘쳐흐르는 동천석실을 올라가 보아야겠다.

겨울 보길도... 흰 눈발 속, 붉은 동백 우수수 떨어지는 세연정이나 고산문학의 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