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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병어로 잘 알려진 석장리

우리 마을 리포트: 완도읍 석장리

  • 위대한 기자 zunjo@naver.com
  • 입력 2015.12.02 23:09
  • 수정 2015.12.07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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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머리 도로변에 있는 의숙공 최강 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


석장리 '멸치'하면 우리 고장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맛있고 품질 좋기로 유명하다. 멸치잡이 철에 갓 잡아 올린 멸치를 삶아 널어놓은 풍경은 마을 전체에 하얀 눈이라도 내린 듯하다. 햇볕에 반짝거리는 멸치는 마을전체를 온통 은빛 물결로 만든다. 석장리를 ‘은빛 마을’이라 부르는 이유다.

석장리는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포구가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접전에 대비해 돌을 많이 모아두었다 해서 석장포라 불리다 지금의 석장리가 되었다는 마을 유래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석장리 원장머리 부근까지 왜구가 40여 척이 넘는 배로 가리포진에 침입해 오자 당시 가리포진 첨사였던 최강 장군의 지휘 아래 군사들과 주민들이 함께 나서서 왜선을 유인하고 불화살로 격침시켜 크게 무찌른 단결심 좋은 마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의숙공 최강 장군의 가리포해전 대첩비’도 세워져 있다.

왜구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석장리 앞 바다는 태풍에도 안전할 만큼 아늑한 포구다. 저 멀리 청산도와 모도가 한 눈에 보이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들 모두 생활고를 걱정해야할 판이다. 멸치잡이 어선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멀게는 청산면 모도 근처까지 조업을 하러 나가지만 갈수록 어획량이 줄고 있어 주민들 시름이 늘어가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위판 횟수도 반 토막으로 줄었다.

어획량이 가장 작은 어민들의 경우 한 해에 보통 20회 이상 수협 위판에 참여하는데, 올해는 대부분 10번 밖에 참여하지 못했다.

멸치와 함께 석장리의 명물 중 또 다른 하나가 병어이다. 완도에선 병어보다 병치라고 불리며 어디에서나 많이 잡혀 생선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흔했던 생선이었다. 유독 6월 산란 직전 석장리에서 잡히는 병어는 살이 통통하고 단단해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잡히지 않고 먼 바다에 나가야 볼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됐다.

석장리에서는 매년 정월이 되면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낸다. 어촌계장과 청년회장을 겸직하고 있는 문상용(44) 씨는 “어릴 때 아버지가 마을의 전통을 잊지 말고 잘 계승해야 한다면서 농악과 제 지내는 법을 알려줬다“라면서,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60대 이상이고 청년들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보니 늘 일손이 부족하다. 완도읍에 살고 있는 석장리 출신 선후배들이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일손을 보태고 있으며 예전에는 용왕제를 크게 지냈지만 지금은 간소하게 지낸다"고 말했다.

문상용 씨는 “석장리로 귀어하려는 젊은이들이 있지만 어획량이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이고 물양장도 비좁다. 마을에서도 귀어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준비를 해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어야할 텐데 고민이다”라며 “마을 청년들이 우리 마을과 바다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많은 방법들을 찾고 있다. 윗세대가 힘들게 지켜온 마을의 유산을 아랫세대에게 다시 물려주기 위한 노력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위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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