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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왜란 마지막 수군본영, 고금도

완도군청에서 소랑도까지 섬 투어 100리길 ②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6.01.06 21:02
  • 수정 2016.01.11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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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15일 고금면 상정리 앞바다가 매생이 양식을 위해 설치해 놓은 대나무 말장과 발로 빼곡하다.

신지 송곡항에서 고금 상정항까지 배로 겨우 5분 걸린다. 배 옆으로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장보고대교는 지난 2010년에 착공해 빠르면 내년 개통을 목표로 상판이 거짐 다 올라갔다. 한국에서 다리공사는 ‘조기개통’이 더 없이 좋은 수식어 같다. 비록 늦더라도 튼튼하고 안전한 다리라면 참 좋겠다. 장보고대교 한가운데에 올라서면 완도 방향으로 상황봉을 마주보고 그 산 아래 장보고유적지인 장좌리 장섬이 보일 것이고, 반대편 멀리 고금도와 조약도를 잇는 약산대교도 보일 것이다.

버스가 고금도 바닷가를 달리면 물속에 긴 말장(대나무)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빼곡하게 박혀 있다. 그 사이로 대나무 발들이 치렁치렁 매달렸다. 매생이 발이다. 지금 고금도는 미운 사위에게 먹인다는 매생이의 계절이다. 대개 1월 말이면 매생이 수확이 끝난다.

상정리, 회룡리, 대곡리 지나는 동안 섬 안에 넓은 옥토가 펼쳐진다. 고금도에서 가장 넓은 신언평야다. 농상리를 지나 면 소재지 앞에도 제법 넓은 평야가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고금도에는 사람 수보다 소가 더 많이 산다고 했다.

이제 터미널에서 잠시 휴식한 버스가 조약도를 향해 다시 달린다. 도남리 입구 삼거리에 비석공원이 조성돼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공적비, 열녀비 등 비석들을 한 데 모아 자세한 설명까지 붙이니 볼거리가 된다. 해방 전후에 국가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졌고,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순국했거나 옥고를 치른 분들을 위한 충혼탑도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잠시 둘러볼 시간이 없는 농어촌 버스는 계속 달린다.

바다가 없는 섬 속 산골마을 신장리를 지나면 내동과 세동 마을이 차례로 나온다. 입구에 보이는 커다란 표지판을 따라 5분쯤 가면 묘당도 충무사가 나온다. 묘당도는 관우 사당이 있었다는 작은 섬이었지만 간척으로 지금은 고금도와 한 섬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해 고금도에 온 명나라 장군 진린이 관우의 사당을 모시고 승리를 기원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유해를 80여 일 모셨던 역사적인 유적지다. 1960년 국가사적(114호)으로 지정된 충무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가리포진 첨사였던 이영남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화성리 앞바다 역시 매생이발로 가득하다. 군데군데 떠있는 작은 바지선에 승용차도 있고 허수아비도 실려 있다. 더구나 밤이 되면 바다는 불야성을 이룬다. 배를 타고 순찰까지 돈다. 철새들의 습격으로부터 매생이를 지키려는 바다 사람들의 고육책이다.

이곳 화성리 바다는 정유재란 당시 철수하려는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조선 수군이 밤낮으로 훈련했던 역사적 현장이었다. 마을에는 아직도 어란정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다.

조약도로 건너가는 약산대교 밑에 덕동 마을이 있다. 덕동은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이 주둔했고 마지막 수군본영으로 삼았던 고금도진이었으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다. 복원 노력도 없다. 역사가 없다.

이제 버스는 약산대교를 건너간다. /박남수 기자
 

지난 1999년 개통된 고금도와 조약도를 잇는 약산대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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