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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설군 120주년의 의미

정영래(장보고연구회 이사장)

  • 정영래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2.18 00:18
  • 수정 2016.02.2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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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설군의 의미는 크다. 육십갑자가 두 번, 120년의 세월은 인생이 두 번 돌아가는 세월이다. 조선조 역사를 더듬어 보면 현,군이 새로 설립된 곳은 완도군이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완도군은 어떻게 설군되었는가? 완도는 본시 4개 현에 속해 있던 섬이었다. 영암현, 해남현, 강진현, 장흥부에 속해 있던 섬들을 모아 하나의 군을 만들었다. 당시 강진현에 속해 있던 고금도는 이조참의를 지낸 심재 이도재가 9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던 곳이다. 고금도에서 9년의 유배생활을 거치면서 완도가 설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해배되어 전라감사를 하면서 완도 설군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도재는 완도 하나만의 설군을 주장하는데 명분이 부족하여 돌산군, 지도군, 완도군 3개 군의 설군을 건의하였다.

3개 군은 1896년 2월 3일 고종 칙령 13호로 설군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돌산군과 지도군은 차후에 여수와 신안으로 편입되고 완도만 지금까지 유지되었다.

그 해는 조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896년 1월 1일부로 음력을 양력으로 변경 사용하도록 선포한 해이기도하다, 1개월 후 설군이 되면서 완도의 역사는 순수하게 양력을 사용하였던 역사를 가지게 된다. 설군이 되고 1주일(7일) 후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1주일만 늦었어도 완도의 설군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섬을 모아서 완도가 되었기 때문에 완도는 배움의 시설이 전무한 상태였다. 완도군 초대 군수 이규승은 전라 감사 이도재의 조카되는 사람으로 완도를 잘 알지 못하였다. 설군에 주역을 담당하였던 침천 김광선에게 군 행정을 맡기다시피 하여 김광선에 의지하였다. 김광선은 설군이 되고 완도의 행정사무를 주도하면서 ‘완도군민회’를 발족하고 ‘완도경영 10조항’을 선포하여 자치행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원칙 하에 군청 청사신축을 뒤로하고 1898년 죽청리에 향교를 먼저 신축하여 교육에 치중하였다. 완도의 교육 사업은 빠른 시일에 정착되었다.

해남과 강진 사람들은 섬 사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였다. “무식한 섬놈들” 이것이 제일 듣기 싫었던 김광선이었다. 따라서 설군이 되면서 교육행정을 최우선하였다. “배워야 잘 살 수 있다.”

향교가 개교하고 7년 후 1905년 대한제국 7대 군수 김상섭이 지금의 완도초등학교 자리에 ‘완도육영학교’라는 이름으로 신교육 3년제 학교를 개교한다. 다음으로 1907년 9대 군수 송원섭이 6년제 ‘사립완도학교’를 만들어 본격적인 신교육 인재육성교육에 돌입하였다. 서울에 한두 개 있었던 신교육의 역사를 받아들인 것이다.

신교육의 효과는 특별하게 우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사립완도학교의 신교육 영향으로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 후 50여년 지나고 1960년 완도는 부의 고장으로 전국에 명성을 날린다.

“완도는 개도 오백환짜리를 물고 다닌다.”

설군이 되고 60여년 만에 전국제일의 군이 되었다. 설군의 역사는 짧지만 문화의 역사는 길다. 풍성한 문화와 섬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은 앞으로 세계 으뜸의 섬이 될 것이다.

역사는 기리고 보전해야하는 것이 후손들의 의무이다. 2016년 2월 3일은 완도 설군 120주년을 맞는 날이다. 군청에서나마 작은 모임으로 그날을 축하하는 조촐한 행사가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