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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포진 성터 방치 아쉬워

우리 마을 리포트: 완도읍 남성리

  • 위대한 기자 zunjo@naver.com
  • 입력 2016.03.03 09:58
  • 수정 2016.03.08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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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완도항 풍경이 펼쳐진 남성리 우물터는 물이 귀한 시절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다. 지금은 농업용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마을로 올라가는 입구 중 한 곳이다. 잡석을로 쌓아올린 돌들이 무너지지 않게 흙으로 다진 흔적도 남아 있다.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인 가리포진 성터는 푯말 하나 없이 수풀만 우거진 채 방치돼 있었다.

완도군청 뒤 남성리와 성내리 마을을 잇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뒤돌아보니 완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어린 시절 이곳에서 뛰어 놀며 자란 재광 향우 김종성(42) 씨는 지난 설에 이곳을 찾아 “골목길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살았던 동네가 이렇게 깔끄막이었다는 걸 25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다”며 옛 추억을 회상했다.

“리어카 좀 밀어 줄래?”라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엿장수 아저씨가 마을의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를 때면 재빨리 뛰어가 밀어주고 달콤한 엿 한 가락 얻어먹던 기억, 동내 친구들과 마을 꼭대기로 성뜰(가리포진 성터)에 올라 불 깡통(쥐불놀이)을 돌리고 폭음탄과 콩알탄을 터트리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옛 추억만 아련할 뿐이다.

당시 성뜰로 불리며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이곳은 1522년 가리포진이 창설되고 이듬해 축조된 석성터라고 전해진다. 이런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 푯말 하나 없는 것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성 뜰 밑에 큰 우물이 하나 있는데, 당시 아짐들이 삼삼오오 모여 빨래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사랑방 역할을 했다. 물이 귀하던 시절 우물물은 식수로 대신하기도 했다.

남성리에는 완도읍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미로처럼 얽힌 돌담들이 늘어서있다. 이 돌담들은 잡석들을 쌓아올린 원조 조선식 돌담으로 또다른 볼거리다.

길이 좁아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불편한 것들도 많다. 이 동네에서 50여 년 간 생활한 차행순(87)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많이 사는 이 동네에 집 앞까지 차가 들어오는 게 소원이다”고 말했다.

오남일(74) 이장은 "생필품을 배달하러 오는 사람들이 가파른 오르막과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 때문에 어려움이 많고 특히 소방도로가 빨리 개설되어야 주민들의 불편이 많이 해소 될 것 같다”며 무엇보다 주거환경이 개선되길 바랐다. /위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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