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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완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3월 15일 완도 학생들 시가 행진 시도

  • 정영래 장보고연구회 이사장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3.03 16:05
  • 수정 2016.03.0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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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래 (장보고연구회 이사장)

올해는 3․1운동이 일어 난지 97주년 되는 해이다.

고종이 1919년 1월 21일 68세의 일기로 서거하자 장례일이 3월 3일로 결정되었다. 만세운동의 선언은 고종황제 장례일자에 맞추자는 계획이었다. 독립선언서가 작성된 뒤 선언 날짜를 정하기 위해 민족대표 33인이 모였다. 만세운동의 선언 일자를 언제로 할 것인지 논의 끝에 고종의 장례일 3월 3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 신자들이 황제의 장례일이 부적합하다는 의견에 따라 3월 2일로 결정했다. 그러나 대표 33인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16인이나 있었다.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따라서 날짜를 앞당기자는 의견에 따라 3월 1일 토요일로 결정했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기미독립만세운동선언은 전국으로 퍼지고 각 지역에서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그러면 완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완도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소안도 송내호 정남국 외 다수와 완도에서 나봉균 최사열 등이 합의해 3월 15일 완도읍에서 완도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시가행진을 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에 의해 시가행진이 저지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이 기폭제가 돼 4월 8일 완도읍에서 대단위 만세운동을 다시 계획했다. 이것 또한 거행 전날 4월 7일 일본경찰에 기밀이 누설돼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주동자 신지면 대곡 출신 차종화는 장흥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는다.

그 후 신지면 임재갑, 임재경이 주도해 신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다음해 1920년 1월 22일 고종황제 서거 1주기를 맞아 고금도에서 고금보통학교 학생 정학균(17세), 이헌열(20세)이 주도해 주민 약 600여 명이 동원된 대단위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완도 3․1운동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우리가 다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의 외침과 희생 속에 1945년 이 땅에 광복이 찾아왔다.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3․1절을 국경일로 제정했다. 그래서 매년 3월 1일을 기념하고 역사를 돌아본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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