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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다문화여성의 ‘왕언니’

완도를 희망하는 사람들: 김인숙 한문교실 김인숙 원장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6.04.21 09:25
  • 수정 2016.04.2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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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 한문교실 김인숙 원장

버스터미널 옆 통행이 불편한 도로 옆에 그녀의 학원이 있다. 짧은 그 도로의 절반은 택시들이 차지했다. 나머지 절반의 공간을 이용해 차들이 오고가며 또 주차도 하니 늘 갈등이 생겨난다. 김인숙 한문교실 김인숙(43) 원장은 그곳에서 10년째 한문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김 원장은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94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완도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한자와 소학, 명심보감 등 한문을 가르치고 있으며 초등학교 방과후수업 교사로도 활동한다. 또 완도 지역 여러 단체가 주관하는 중국어 강좌의 강사로, 경찰과 군청 등 기관의 중국어 통역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김 원장은 참 많은 자격증을 가졌다. 운전면허증과 직업인 한자·한문 지도 관련 자격증을 비롯해 컴퓨터 관련 자격증 그리고 보육교사, 평생교육사, 상담사 등과 사회복지사 등 30개가 넘는다.

구순을 넘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성리 살고 있는 김 원장에게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들과 고등학생 딸이 있다. 학원에서 그녀가 가르친 아이들이 군대를 마치고 학원으로 인사하러 올 때가 그렇게 행복하다고 한다. 이제 아무도 김 원장을 중국인이라 부르지 않지만 그녀가 살아온 22년 세월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이만큼 살기 위해 진짜로 고생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완도살이를 들어보자.

그녀가 태어난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이다. 북경과 달리 한국인이 많지 않고 한국어학교도 없다. 그녀는 자라면서 부모들처럼 중국어를 사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인이 경영하던 회사에 취직하면서 처음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1994년 노동절 연휴에 한국인이 경영하던 하얼빈 회사에 같이 다니던 언니의 소개로 한국에서 온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당시 한국은 부자나라로 인식돼 한국 사람과 결혼하면 ‘손에 물 안 묻히고 살 것’으로 생각했고 하얼빈에서 한국인은 우상이었다. 나이 차가 많았지만 북경대사관까지 가서 혼인신고를 했고 그해 연말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의 기대와 꿈과는 달리 시댁은 완도읍에서 미역양식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새벽에 바다에 나가 미역을 채취했다. 한번은 홍합을 따기 위해 남편과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지만 30분만에 심한 멀미를 했고 다시는 배를 탈 수 없었다. 하얼빈에는 바다도 배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식도 맞지 않고 한국어도 안 통해 완도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남편이 “정 살기 어려우면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첫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견디며 살아가기로 했다.

아들과 딸 두 아이가 태어났다. 미역공장에서 1년 정도, 컴퓨터학원 강사로 잠시 일하기도 했다.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다. 다방업지부 간사로 일하면서 완도가 12개 읍면인 것을, 다방이 120개인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즈음부터 그녀는 공부하기 시작했다. 강진 성화대학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이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에 편입해 주말마다 수업과 시험을 위해 광주와 목포를 오가야 했다. 어린 딸을 이웃에 맡기고 시험 치러 갈 때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한 한기 늦은 5학기만에 방송대를 졸업해 학사학위를 땄다. 두 아이에게 늘 미안했지만 그렇게 성장한 까닭에 크면서 누구보다 자립심이 강했다.

방송대 졸업 후에도 공부를 계속해 4년 정도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한자와 한문학을 공부했다. 한국의 한자는 어려서 중국에서 배웠던 간자체와 달라 새로 배워야 했다. 이를 기반으로 완도에서 한자·한문 전문학원을 등록해 아이들을 지도했다.

김 원장은 학원뿐만 아니라 방과후 수업에서도 인기 좋은 명강사다. 초등학생들에게 한자 자격증 시험에 대비한 수업을 진행하고 사자소학 등을 함께 가르친다. 완도청년회의소(JC)에서 6년 연속 중국어를 강의해 왔고 완도문화원과 완도군청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강의하고 있다.

완도 생활 22년 차인 김 원장에게도 아직껏 불편한 것들이 있을까? 처음 완도에 왔던 김 원장이 놀랐던 것 두 가지는 무덤이 많은 것과 마을마다 교회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한국말 때문에 그녀가 중국인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나라의 언어에서 어순의 차이(술목관계)를 아직도 헷갈려 한다.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고향의 음식과 향수(그리움)라고 말한다. 중국 음식과 재료를 가족들로부터 받아 이용하고 고향(중국) 사람을 만나면 그냥 좋고 반가워 한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인 하얼빈까지 인천에서 2시간 거리이지만 이제 바빠서 가기가 어렵다.

김 원장의 학원은 터미널 옆 도로가에 있어 늘 불편하다. 주차도, 통행도 자유롭지 못하다. 걸핏하면 택시 기사들과 싸우기도 한다. 군청 교통계 공무원들과도 늘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국 사람이라 차별하는 것 같아 서러울 때가 많다. 모두가 원하는 일방통행 지정을 규제로 여기는 행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김 원장은 완도에서 다문화 왕언니로 통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문화 혜택을 별로 받지 못한다. 이제 아무도 그녀가 다문화로 인정 안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완도사람'인 그녀에게도 마음 속 깊은 아픔은 있었다. 다문화 1세대인 그녀의 아이들이 커오면서 친구들과 주변으로부터 받은 놀림과 차별 때문이다. 심지어 왕따도 경험했다. 그래서 두 아이는 아직도 엄마 나라의 말과 문자를 배우지 않는다.

완도 다문화의 왕언니 김인숙 원장. 살아오면서 싸움도, 욕도 많이 하며 억척같이 살았다. 그간 22년은 눈물의 세월이었지만 이제는 웃으며 살아간다. 20여년 시간이 흘러 이제 완도는 진짜 다문화의 섬이 됐다. 결혼 이주여성은 물론 이주노동자들이 완도 경제의 주력을 이루고 있다. 완도가 진짜 건강의 섬이려면 이들이 행복한 섬이어야 한다. 김인숙 원장의 22년이 완도 사람이 되려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22년은 우리가 그녀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난 2015년 완도문화원이 주관한 완도군민 대상 중국어강좌에서 김인숙 원장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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