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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도 맛있게 발효시켜 온 큰언니‘박인자’

리더스 칼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9.02 10:24
  • 수정 2016.09.0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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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출신/미국 거주

우리집 뒤안에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큰 맘을 먹고 장만한 장독 하나가 다소곳하게 자리하고 있다. 텍사스의 뜨건 햇살에도 까만 눈을 반짝이며, 밤이면 하늘의 별들과 소곤소곤 속삭이면서 말이지. 우리집에 오기 전에 그는 아주 긴 여행을 했을거야! 고향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넘실대던 푸른파도의 설레임까지 고이 그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지난 겨울, 우리 아이들과 만들었던 어설펐던 메주덩이는 어느사이에 된장이 되어 그의 품에서 새록새록 익어가고 있다. 아들은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엄마! 올 해는 된장 안 만들어요?" 하며 나의 열정을 자극했었다. "우왕~ 그랴 그랴~ 우리 함께 맹글면 증말 재밌겠당~" 하며 나는 신바람이 나서 곧 바로 한국마켓으로 차를 몰아 갔었다. 그리고 밤 늦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들과 손 절구로 삶은 콩을 으깨어 메주를 만들면서 괜히 시작했다고 후회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에 혼자서 메주를 띄우고 말려 장을 담그는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아이들이 메주에 남긴 손 자국들을 보며 추억도 담그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닫을 때면 사그락 사그락 말을 걸어오는 장독으로 인해 나의 어린시절 추억들은 생기를 얻어 되살아 나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옹기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는 어쩜 그리도 맑고 고운지...
 "토록 토록 또르륵..."
아마도 내가 만든 저 된장은 빗줄기의 청아한 소리도 머금고 있을거야! 풀벌레가 찌르르 그 곁에서 울어 대면 전율하듯 더 깊은 맛으로 익어갈지도 모르겠어!

예전에 우리아버지는 입맛이 몹씨 까다로웠다. 엄마는 가난한 살림살이 중에도 아버지를 위해 늘 별미를 준비하셨고 그 음식은 아이들 중에 오로지 늦둥이였던 나에게만 허락되었었다. 꼬맹이 민서는 아버지곁에 꼬옥 붙어앉아 통실한 장어 양념구이며 딱돔 숯불구이, 매생이 국 등 맛있는 음식은 귀신같이 찾아 먹고는 했다. 그러다 맛난 반찬이 떨어지면 나도 아버지처럼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철부지였던 나를, 언니 오빠들은 지금도 떠 올리며 예전에 엄마가 만드셨던 그 음식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들에게는 그 때에 실컷 먹어보지 못한 그 맛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들이 아직도 삶의 곳 곳에 배여 있었다.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생각해 본다. 나는 왜? 먼 이국 땅, 텍사스에서 잊혀져가는 우리민족의 뿌리같은 맛을 찾아가고 싶은 걸까? 아마도, 된장이 옹기의 품 안에서 햇살, 별빛, 바람의 음성에 귀 기울여 익어가듯이, 나도 그의 품 안에서 맛있게 숙성되고 싶은가 보다!

지나간 긴 세월동안, 아픔도 상처도 맛있게 발효시키며 살아오신 나의 큰언니..., 된장을 담그며 언니의 시를 음미하다 보니 그 곳에는 벌써 엄마도, 할머니도 오셔서 빙그레 웃고 계셨다.

옹기 / 박인자

우리 할머니
우리 어머니의
자존심 이던 옹기들
대문 들어서면
햇빛 잘 드는 곳에
내 어머니의 머리단처럼
고운 자태를 뽐 내던 옹기들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와도
온 몸으로 막아내던
옹기의 그 의연함 속에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옹기 안에는
우리 할머니의 인생이
우리 어머니의 인생이 녹아있다
어떤 상처도 아픔도
옹기속 깊이 깊이 묻어두고 발효시켜 맛을 내는 지혜를 말 하는데 작은 아픔에도 서운한 말 한 마디에도 불쑥 불쑥 일어나는 나의 자아들 꾹꾹 누르고 다독거려 본다.
나도 삭아서 발효되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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