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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노예생활을 자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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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형진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9.23 11:43
  • 수정 2016.09.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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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5월 19일에 창립된 완도군 청년회의 초대 총무를 맡아 지역 청년활동을 이끌었던 김장렬(1899~1959)은 완도지역에서 배출한 초대 국회의원이자 제헌의원으로써 보성중학교 재학 중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돼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본의 전문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귀국해 완도에 노화 금일 서성학교를 세웠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완도군 지부장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투신했다.

제헌의원에 당선 된 후에는 헌법기초의원을 선출하는 전형의원(각도별 1명 선출)에 선출된 바 있으며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반민특위 특별재판관직을 내놓았다.

지지난호(본지 1050호)에 완도객사와 관련해 소개됐던 <... 완도청년연합회의 주최로 소안도노농회 간부로 공무방해죄명하에 광주형무소에서 일개년의 철창생활을 하고 금번에 출옥된 신준희 김형천 정남국 씨의 환영회에서 금장렬 군의 환영사와...>

 이 기사에서 <금장렬>은 <김장렬>의 오기(誤記)다. 원문이 보관된 동아일보에서 김장렬의 김(金)를 금(金)으로 오기해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향우인 신현성 씨가 정정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신현성 씨는 "완도 제헌 의원이었던 김장렬은 6.25 전쟁 당시 납북되었고 북한에서는 월북으로 처리해서 평양의 월북인사 묘역에 안치되었다"고 밝히며, "김장렬의 묘가 발견되기 전에는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평양의 월북인사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은 월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며 "특히나 해방공간에서 반민특위 위원장을 하다가 이승만의 간섭으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김상덕이 남한 정부에 실망한 후 전쟁 와중에 월북한 것을 보아서는 김상덕과 같은 묘역에 묻힌 김장렬 또한 월북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자발적으로 월북했느냐? 아니면 납치돼 납북 되었느냐? 이 논란은 이념의 대립 상황에선 가족들에겐 자칫 큰 상처로 남을 수가 있겠는데, 현재 유족회에선 납북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냐를 떠나 그가 보여준 행위만큼은 후인들에게 크나큰 귀감으로 남고 있는데,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사진)가 열리고, 보름이 지나 의원들은 미군용기의 독도 폭격 사건을 다루게 된다. 전말은 미군용기 9대가 울릉도를 돌다가 미역을 따는 우리 어선들을 향해 폭격을 퍼붓어 어선 11척이 뒤집히고 14명이 죽는 참사가 일어난다.

이때 김장렬은 발언권을 얻어 “우리민족이 이같은 박해를 당하고서도 국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노예생활을 자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위자료와 선박피해에 대한 배상을 미국에 요구해야 하고 국제적으로 여론을 환기시켜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참으로 의기롭고 당당한 말이었다.
김형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