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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가슴이 울 때 천하가 운다”

[이사람]청하무역 박양환 대표

  • 한정화 기자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10.28 10:18
  • 수정 2016.10.2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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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의 삶인들 소설 같지 않을까

우리가 흔히 하거나 듣는 말이 있다. “내가 살아 온 얘기를 다 꺼내놓으면 소설책 열 권이 넘을 것”이라는 말. 맞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소설 같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하나밖에 없는 삶이지만 누구나 만나지는 못할 특별한 인연을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1960년 강진에서 태어난 박양환 씨. 완도에서 둥지를 튼 지는 17년째. 그의 특별한 인연은 올해 100세가 된 일본인 기타나카 가스미. 강진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스물 여섯 살, 1984년 서울의 한 선박회사에 근무할 때였다. 어느 날 회사로 일본인 두 명이 왔는데, 그들의 안내 역할을 맡게 됐다. 서울의 곳곳을 안내하고 저녁에 술도 한잔 하고 명함을 주고 받고 헤어졌다.

“그 당시 무역은 되는 사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만 무엇을 갖다 팔아야 성공할지 그 궁리만 했지요”. 무역가의 꿈을 품고 있었던 그는 당시 펄펄 끓고 뛰던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나이 가슴이 울 때 천하가 운다”고.

일본인들이 다녀간 후 일본에 가고 싶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양환 씨는 그 중 한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을 일본에 초청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타국에서 한 번 만난 청년이 대뜸 초청해 달라는 데 단박에 그러마, 할 사람이 있을까.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이번에도 답은 없었다. 세 번째 편지를 보냈을 때 비로소 답장이 왔다. 그렇게 연이 된 사람이 기타나카 가스미. 당시 일본 비자 받기가 까다로웠던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수락했고 양환 씨는 드디어 일본땅을 밟게 됐다. 기타나카는 모든 비용을 댈 테니 한 달간 아무 걱정 말고 지내라고 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져 한껏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던 어느 날 신주쿠로 가는 열차 안 맞은편에서 한 여성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목숨이 아깝지 않아 아니, 목숨을 바쳐

시선이 마주치면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다시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고 그러다가 신주쿠역에서 내렸을 때 그녀가 차 한잔 하자고 말을 걸어왔다. 혈기 왕성한 이십대 청년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녀는 재일교포였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그녀의 아버지가 한 무역사 대표라는 걸 알고는 어디 계시냐 묻고 당장 가서 뵙겠다고 나섰다. 당시 집어기 무역에 골몰해 있던 그는 무역사 대표를 만난 이후 기타나카가 베푼 한 달을 다 누리지 않고 15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버렸다.

이후 연신내 근처에 총대리점을 열고는 집어기에 매달렸다. 동해 서해 남해를 돌며 시장조사를 하고 집어기를 알리며 다녔다. 반응은 좋았다. 선주들은 그의 말대로 물고기들을 확실하게 모을 수만 있다면 사겠다고 했다. 그는 실험만 성공한다면, 당시 5백만원에 달하는 비싼 집어기 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수협에서 대출해주도록 정부에 요청하는 브리핑 자료까지 이미 준비했다. 이제는 확실한 효과를 실험을 통해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목숨이 아깝지 않았어요. 아니, 목숨을 바쳤어요”
남해에서의 실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갈치가 몰려와야 하는데 갈치는 안 오고 엉뚱한 것들만 몰려들었다. 동해의 오징어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기술자를 불러들여 여러 시도를 해보았으나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기타나카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다시 초청해줄 것을 요청했다. 달리 특별한 인연이겠는가. 이번에도 기타나카는 흔쾌히 그를 받아들였다. 대학에 도전하겠다는 그에게 2년간 학원비를 대줬다. 2년 후 그는 와세다대학교의 합격장을 받아들었다.

 

평생의 숙제를 남겨

“너 내 아들해라!” 그 감격의 순간을 기타나카는 그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사회학을 전공한 4년 내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기타나카. 졸업 후 귀국하는 양환 씨에게 “갚을 생각 말고 성공해서 어려운 사람 도와라!”는 평생의 숙제를 남겼다. 

고등학교 시절 그에게는 세 가지 꿈이 있었다. 그 중 첫 번째가 수출 100만불을 달성하는 것. 고등학생이 그 무슨 황당한 꿈이냐 묻자 웃으며 답했다. “그날이‘수출의 날’이었어요. 누군가 수출 100만불을 달성했다고 대통령 훈장을 받는 장면을 봤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나이 들면서 그때가 떠오르면 나라고 못하겠나 100만불 수출,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지요”

 

마지막 꿈은 이루지 못할 것 같아

현재 전복을 수출하고 있는 그는 4년 전 수출 5백만불 달성에 성공했다. 무역협회에서 주관하는 성공사례 공모에도 입상해 큰상까지 받았다. 황당해보였던 첫 번째 꿈이 이루어진 셈이다. 두 번째 꿈도 이뤄냈다.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꿈이었는데 덜컥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마지막 꿈은 아무래도 못 이룰 것 같아요” 그의 세 번째 꿈은 다름 아닌 히말라야 정복. “이 나이에는 무리한 꿈이지요. 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고 적어도 베이스캠프까지는 꼭 갈 겁니다” 그는 웃었다.

최근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박양환 씨. 그러나 극복할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야 평생의 숙제를 할 수가 있죠. 제가 받은 인연의 은총을 누군가에게 갚으며 살아야 하니까요”

인연이란 상대적인 관계이다. 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된 상태라야 나를 찾아온 소중한 인연을 알아보고 놓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사나이 가슴이 울 때 천하가 운다'던 양환 씨. 그의 특별한 인연은 운이 좋았다기보다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목숨을 바칠 만큼' 꿈 꾸고 도전하고 부딪치며 살아왔기에 받을 수 있었던 특별한 선물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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